遁世詩(둔세시)/최치원
바위산 미친 듯이 쏟아진 물소리에
지척의 사람 소리 분간키 어려워라
속세의 시비 가리기 귀를 먹게 하구나.
狂噴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광분첩석후중만   인어난분지척간
常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상공시비성도이   고교유수진농산

요즘 세상이나 오래전 이 땅의 사람 사는 모습이나 시끄럽고 시비 많은 건 같은 모양이다. 제가 예전에 쓴 글 중에서 합천군 가야산 홍류동 소리길을 걸으며 보고 느낀 이야기가 있다. 그 글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을 최치원 선생과 관련된 부분과 농산정(籠山亭)에 얽힌 이야기로 채웠었는데, 지금 다시 그 글을 읽노라니 최근 우리 사는 세상이 새삼 감추고 싶고 지울 수만 있다면 진정 지우고 싶다.  홍류동석벽제시(紅流洞石壁題詩) 가야면 치인리 홍류동 학농산정 건너편 석벽에 고운선생의 둔세시가 새겨져 있다. <미친 물 바위 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 하네.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감쌌네. 번역: 이은상> 이 시가 새겨진 돌을 후세 사람들은 치원대 혹은 제시석(題詩石)이라고 불렀다. 이 제시석은 세로 4척 8촌, 가로 2척의 각면에 글자 가로가 5촌 5푼의 초서로 세 줄이 새겨 있다. 딱한 처지를 시문으로 읊고 있다. 하루같이 새우잠 자는 안타까운 처자 자신의 모습을 읊었던 시를 번안해 본다.

해마다 나는 이렇게 홀로 잠만 잔다오(貧女吟)로 제목을 붙여본 오언배율 넷째수다. 작가는 허난설헌(許蘭雪軒:1563~1589)으로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이다. 허난설헌은 첫째는 자신이 중국이 아닌 조선에서 태어난 것, 둘째는 남자가 아닌 여자로 태어난 것, 셋째는 이백이나 두목지 같이 출중한 남편을 만나지 못한 것 등 세 가지가 한이라고 하였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손에다 가위 쥐고 옷감은 척척 마르면서도 / 밤도 차가워서 열손가락이 곱아온다오 // (날마다)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지만 / 해마다 나는 (시집가지 못하고) 홀로 잠만 잔다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가난한 여인의 노래4]로 번역된다. 가난한 집의 처자라고 시집가지 못하란 법은 없다. 오직 가난이 죄라고 하면 죄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시집가지 못한 여인이 마음속으로 간직할 수는 있었겠지만, 자기의 심회를 글로 표현다거나 밤마다 홀로 잔다는 식의 표현을 하기란 쉽지 않는 사회 관습적인 시대였다.
그렇지만 시인은 자기의 심회를 거침없이 표출해 냈다. 시집가지 못하고 남의 길쌈만 하는 자기의 처지를 가감없는 시상 주머니에 담아냈다. 한 손에다 가위 쥐고 다른 손으론 옷감은 척척 마르면서도, 동지섣달 기나 긴 밤이 그리도 차가워서 열손가락이 곱아와 호호 입김을 분다고 했다. 선경에 의한 현재 처한 자기의 입장을 잘 드러내 보이고 있다.
화자는 이어지는 후정에서는 현재의 처지와 심회를 길게 읊었다. 날마다 남을 위해 시집갈 옷을 짓고 있지만, 해마다 나는 시집도 가지 못하고 밤마다 홀로 잠만 자고 있다고도 했다. 조선 여인이 밤이면 홀로 잠잔다거나, 시집을 가지 못해 안달을 내는 것은 용서치 못을지라도 시문으로 이런 심정을 표출하는 건 허용할 수 밖에는 없었지 않았을까.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옷감 쥐고 마르면서 열손가락 곱아오네, 남을 위한 시집갈 옷 나는 홀로 잠만 자고’ 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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