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정비·행장비 제막식 장면>

관서별곡 저자 기봉 백광홍 선생의 친동생인 옥봉 백광훈에 대한 역사적 조명을 우리군은 소홀히 하고 있다. 어쩌면 형의 ‘관서별곡’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옥봉의 천재적인 시 문학을 덮었는지? 아니면 선생의 묘소와 유물관이 이웃 해남에 소재하여 해남의 인물로 착각한 것은 아닌지? 선생은 안양면 기산리에서 태어나 소년 시절을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외가에서 생활했다.
옥봉 백광훈 선생의 영정 봉안식 및 묘정비ㆍ행장비 제막식이 관내 기관사회단체장 및 수원백씨 전남종친회장과 제자손이 참석한 가운데 해남 향교 주관으로 지난 3월16일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126번지에서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옥봉 백광훈은 조선 8대 문장가로 혹자는 명필로 세상에 알려져 있어 文林長興이 낳은 위대한 선생의 일대기를 요약해본다.

조선 16세기 김안로, 허황등이 중종의 문정왕후를 폐하려다 실패하여 폐사되거 귀양을 가게된 어지러운 시절, 문인들은 이런 사회 풍조에 맞춰 지팡이 하나에 짚신을 걸머지고 팔도의 명산대천을 유랑하며 어지러운 시절, 문장으로 토해내는 유랑문학을 태동시킨다.
 

▲(옥봉 백광훈 선생 영정)

그 대표적 시인이 옥봉 백광훈이다.
그는 당시 宋詩(송시)의 풍조를 버리고 唐詩(당시)의 풍조를 쓰려고 노력하여 최경창, 이달(李達)과 함께 三唐派 (삼당파)시인으로 불린다.
팔문장(八文章:조선중기에 널리 문명을 날리던 8대문장가를 일컫는다.)
玉峰 白光勳(옥봉백광훈) ,龜峰 宋翼弼(구봉송익필) , 重湖 尹卓然(중호윤탁연) 鴉溪 李山海(아계이산해) , 孤潭 李純仁(고담이순인), 孤竹 崔慶昌(고죽최경창), 簡易 崔緝(간이최집) , 菁川 河應臨(청천하응림)의 한사람으로 인정받았고, 永和體(영화체)에도 빼어났다.
●옥봉 백광훈 서실 소장품 일괄(玉峯書室 所藏品一括)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81호(1991년 7월 19일 지정) 전남 해남군 옥천면 송산리 129에 소재한 옥봉은 1537년(중종 32) 정유년에 전남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에서 아버지 백세인(진사, 참봉을 지냄)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맏형 광홍(기봉:평양평사로 관서별곡 저술)과 중형 광안(풍잠), 종형인 광성(동계)과 함께 일문 4문장이라 불리였다. 그의 천부적 재질은 아들 백진남, 손자 백상빈에 까지 이어져 삼대시인 가문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은 이들을 三世三絶 (삼세삼절) 이라 칭송했다.

옥봉은 1541년 5세 되던 해에 스승을 따라 옥천면의 하동정씨 정응서의 문하에서 글공부를 하게 된다.
총명하고 영리하기로 소문이 난 옥봉은 여섯 살이 되면서 “시재(詩才)”를 발휘하기 시작 했으며 낙엽이 지고 앙상한 나무 가지만 남겨진 어느 날 집에 가기위해 글방을 나서다가 문득 시상이 떠 오른 것 이였다.
<호재정진수 화개우일래(好在庭前樹 花開又一來)>라, “뜰 앞에 가득한 나무들아 잘 있거라, 꽃 피는 봄날이 오며는 다시 찾아오겠노라,”
이때부터 옥봉은 스승의 기대를 독차지 했으며 11세 때는 초종장에서 자작시를 낭송했다.
<석양강상적 세우도강인 여향묘무처 강화수수춘(夕陽江上笛 細雨渡江人 餘響杳無處 江花樹樹春)>이라, “석양의 강가에 피리소리 떠도는데 가랑비에 강을 건너는 사람 있구나, 들려오던 소리는 온데간데없는데 강가의 꽃잎이 돋아나 나무마다 봄이 로다>” 이렇듯 어린 나이에 시상이 밝고 시재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13세에 진사초시에 응하고, 14세가 되던 해에 청연 이후백 문하에서 고죽 최경창, 윤사문기, 죽곡 임회, 남계 김순 등과 함께 수학하고, 17세 때 송천 양응정, 사암 박순에게서 새롭고 폭넓은 학문을 읶혔다.
20세에 하동정씨 강옥 딸과 혼인하고, 22세에 상처를 하게 되면서 젊은 나이에 한스러운 세상을 잊기라도 한듯 진도 귀양지에 있는 소제 노수신을 산 넘고 물 건너 찾아가 계속 수학을 한다.
24세에 재취하니 그 또한 하동정씨 응서의 따님이니 2자를 두었으며 만취당과 옥산서제를 지어 학문에 전념하게 된다.
28세 때는 중진사가 되고 벗들과 산수를 즐기게 된다. 당시에 고죽 최경창 손곡 이달과 함께 삼당시인으로 일컬어 졌으며 8문장가로의 명성을 떨쳤다.
36세(1572)때는 중국의 사신 한세능, 진삼모가 우리나라에 왔을 때 소재 노수신의 추천으로 관반백의 제술관에 부임되고 중국 사신에게 시 한수를 지어 올렸다.
<성상비아귀욕진 석변유수거머정(城上飛鵝歸欲盡 席邊流水去無情)>했다.
“성위에 날아가는 까마귀 모두 돌아가려 하는데 자리 주위에 흐르는 강물무정하게 흘러가네.”
이 시를 받아든 중국사신은 참으로 옳은 시다, 하고 상을 내리고 백로선생이라 찬탄하였다.
41세에 선릉 참봉에 임명되고 이때 서울로 향하던 옥봉은 남원군수 손녀성이 주최한 시회가 있었는데 이 시회에는 이달, 인제, 양대박 등이 시제를 겨루었다.
당시에 아버지 옥봉과 함께 길을 가던 아들 송호 백진남이 시 한수를 지어 내 놓으니 칭찬이 자자하였다.
현재 광한루에는 송강 정철과 옥봉 백광훈의 찬시가 한 서판에 나란히 계시되어 있다.
44세에 예빈사 참봉겸 주자도 감조관을 역임하고 46세(1582) 5월에 소격서 참봉을 끝으로 운명을 달리 하였다.
선조(宣祖:1567~1608)께서는 친히 영여를 하사 하시고 이율곡으로 하여금 장례관을 삼아 해남까지 반장을 주선하였다.
또 전라도 관찰사 정철은 각군에 명하여 반장을 도우라 명하고 함께 통곡하며 손수 해남까지 장례에 앞장섰다.
당년 9월에 안장하고 장지는 북평면 동해리 해림산이며 매년 송산세사(松山世祀)에서 춘분제를 올리고 음력 10월 6일은 묘전시제를 올린다.

●소장품 일괄
-영여(靈與)-옥봉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긴 선조께서 직접 하사하여 서울에서 해남까지 옥봉의 영정을 운반해 온 혼가마로 당시 장례책임자는 율곡 이이였는데 서울에서 전주까지 율곡이 직접 운반을 맡았고 전주에서 해남까지는 송강 정철이 몸소 수행했다고 한다.
크기는 전체길이: 243cm 몸체: 23cm 높이: 77cm 폭: 50cm이다.
-강첨(講籤)-대나무를 정교하고 얇게 다듬어 붓으로 글씨를 새긴 것인데 종이가 실제 쓰이기 전에 원시적인 필기장으로 “방책”이라고도 하는데 내용은 논어를 새긴 것으로 보인다.
강첨 둘래는 20cm의 원통형 통속에 약 1,500여개가 꽂혀 있으며 한 개당 높이는 15cm 폭 0.3cm 두께 0.5mm 정도로써 한쪽에 13자에서 20자씩의 한문이 새겨져 있다.
-논어등본(論語謄本)2권
-옥봉이 남긴 유일한 서책으로 가로 26cm 세로 16cm의 친필 교본으로써 376쪽에 11행 24자씩 새겨져 있다.

▲옥봉선생과 함께 3대 시인 의 비 (중앙 옥봉선생
왼쪽 아들 백진남, 오른쪽 손자 백상빈)

-중용(中庸:단본과 해역본 2권)-당시 교육용으로 쓰이던 중용을 붓으로 필사한 것인데 한글해설이 함께 있어 당시 한글 변천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옥봉친필 옥돌서법체본(26개)-옥(玉)으로 만들어진 이 서법체본은 한자의 기본글자를 옥돌에 음각(陰刻)으로 새겨 찍어 냄으로서 한문 교육용으로 사용했던 귀중한 유물로 크기는 대ㆍ중ㆍ소형 세 종류이다.
-장춘동 수창록(酬唱錄)-수창록을 보면 대흥사 장춘동을 오가며 당시 문장가들과 관료들과의 글을 주고받은 필사본으로 문장의 저자로는 영의정 사암 박순, 전라도 관찰사 송강 정철, 종성부사 고죽 최경창, 시인 백호 임제, 순창군수 김천일 등과 교류가 깊었다.
-목판본(木版本) 일괄-목판은 옥봉의 장남 송호 백진남이 제작했으며 또 한석봉의 친필목판도 6매가 있다.
-기타 유물-옥봉과 관련된 유물은 각종 문집외에도 明나라 사신이 남긴 글씨와 그림, 그리고 교지(敎旨), 이조백자, 향로등 다양한 종류가 포함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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