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조선사회는 '대과 급제자'라 하여도 만사형통(萬事亨通)은 아니었다. 그 시절 신분(身分)사회를 고단하게 살다갔을, 장흥 안양방 출신 '김씨(金氏) 형제' 급제자를 생각해본다. (그 '본관, 이름'은 생략한다) <장흥읍지 정묘지,1747>와 <사마재 제명록>에 그 金氏 삼형제가 언급되어있다.

그들은 '상한(常漢)' 출신이었다. 그럼에도 어린 시절 재예특이(才藝特異)한 모습이 안양방 출신 '정해군 백수장(1469~1543)'의 눈에 들어왔다. 부친 金씨가 "상놈의 글은 쓸모없으니, 성명이나 알면 충분합니다(常漢之文無用 知姓知名足矣)"라 하면서 권학(勸學) 권독(勸讀)을 거부하자, 이에 '백수장'이 부친 金氏에게 곤장을 칠 정도로 형제들을 후원하였다. (그들이 과거응시 때 기재한, 부친의 직책 '병절교위 行충좌위 사맹'이라는 종8품 무반 음관 산직(散職)은 실제 사실과 달랐을 것.
그 부친 이름이 다르게 나온 경우도 있다.) 1531년에 ‘둘째’가 소과(진사시)에 입격했고, 1534년 식년試에 대과 갑과 3위(탐화랑)에 급제하고, 그 같은 해에 ‘셋째’도 진사試에 입격했다. 다시 ‘셋째’는 1543년에 대과 병과에, 1546년에 문무 당하관들이 응시하는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같은 안양방 출신 '기봉 백광홍(1522~1556)'보다 앞선 연배들인데, 시골 장흥 출신으로 대단한 성취였을 터, 그 기쁨이 얼마나 컸을 것인가! 부친 金氏는 "모든 게 ‘정해군 대감’의 덕분이다."고 소리치며 마을 앞에서 춤을 추었다한다. '계서 백진항(1760~1818)'의 <계서유고>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3형제 동방(同榜)진사, 동년(同年) 우(又) 급제방"이라고 언급된 부분은 실제의 사실이 아니다. 3형제가 따로 진사입격, 두 동생은 따로 대과급제였다. 그런데 그들이 공부하던 무렵에 장흥 향촌에서 장흥 사람들에게 지도적인 가르침을 행하고 있던 탁월한 유배객, ‘영천 신잠’이 그들과 마주쳤다는 인연은 어떤 기록에도 나오지 않았다)

한편, 입신(立身)에 나선 두 동생 형제들의 벼슬길은 순탄치 않았다. 짐작해 보면, 그 보이지 않는 신분 사다리, 한미비천(寒微卑賤) 출신이란 잣대에 걸려 한직(閑職) 말직을 전전하였을 것이다. 그 스트레스는 오죽했으랴, 형제는 종6품 현감으로 관직을 끝냈으며, ‘둘째’는 일찍 요사(夭死)했다한다. (‘둘째’의 1534년 동년 급제자로는 '장원 김희성, 2위 정응두, 을과1위 이황, 병과6위 송기수'도 있었고, 마침 장흥사람 광산김씨 '김협'이 을과6위였다.) 형제들은 그 상한(常漢) 신분 내력을 아는 고향에서도 운신(運身)이 어려웠을 것. 그 金氏 집안의 흔적과 후손은 장흥 지방에서 얼른 보이지 않는다. 인근의 유력 집안과 혼사도 없었던 것 같다. 다만 그 시절 처지를 말해주는 딱한 사연 하나가 전해진다. ‘청금 위정훈(1578~1662)’의 <청금유고>에 나온다. “ ‘무장현감’의 증손(曾孫) 김득성이 양반 현관(顯官)의 자손임에도 고읍과 남면을 오가며 정처 없이 근근연명하고 있는 형편이니, 그 천역(賤役)을 면해주는 덕선음덕(德善陰德)을 베풀어 달라”는 <상 성주서(上 城主書)>를 누군가를 대신하여 곡진히 올리고 있다. 그때 城主, 곧 장흥부사가 그 일을 과연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아마 金氏 형제들은 다시 고향 장흥을 찾지 않았을 것이리라, 새로 정하게 된 타지(他地) 거처에서도 제대로 정착 못했을 수 있다.

그 부친 金氏 묘소는 어디에 모셨을까? 장흥향교의 <사마재 제명록>은 3형제의 ‘첫째’에 대해 두 동생들보다 늦은 진사 입격자로 기록하고 있는데, 그 자세한 내역은 확인되지 않는다. 이제는 그 신분이 그 인격이던 조선사회도 아닐뿐더러, 전혀 달라진 세상이다. 옛 장흥사람의 안타까운 이야기라 소개해 보았다. 立身은 했으나 양명(揚名)은 여의치 못했을 金氏 3형제의 고단한 인생행로(行路)에 늦게나마 위로 말씀 드린다. 경상도 지역의 어느 마을에는 지금도 ‘셋째’의 공적비(功積碑)가 서 있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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