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8~19 일 부산면 호계리 정월대보름 옛 고전 풍습인 317 회 별신제 가 각 도시 출향향우 및 마을주민들과 함께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지방 민속자료 제43호 인 별신제에 관한 연구서(저자 박흥주 서책 발췌)에 보면  호계리 별신제는 천(天),지(地),인(人)의 조화로 국태미안(國泰民安) 세시년풍(歲時年豊) 가무질병(家無疾炳)을 기원하는 행사로 매년 음력 정월 보름달이면 인근 주민들과 함께 봉행하는 민속제전(1702년~현재)까지 그 풍습을 대대손손 이어 오고 있다.

시골 어디나 하나쯤 있을 법한  풍습

마을 단위로 이뤄지는 대동치성 중에서 ‘천제(天祭)’라 이름 붙인 사례가 왕왕 발견된다. 마을 주민들이 천제라고 인식하며, 또한 그렇게 부르는 경우이다. 마을 굿은 본질적으로 제천(祭天)의례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그러나 거의 ‘천제’라 일컫지 않는다. 주지하다시피 당제, 당굿, 산제, 도제, 별신제. 별신국, 도당굿, 도당제, 헌식둣, 부군당굿, 산신제, 풍어굿 등으로 불린다. 그 마을이나 고을이 속한 지역문화권의 특성과 역사, 생산토대, 당의 형태나 신격등에 따라 명칭이 붙여지고 그에 걸맞은 내용과 형식을 갖게 마련이다. 이런 일반적인 특성에 비춰볼 때 ‘천제’라는 명칭이 붙는 경우는 분명 특별한 사례에 속한다.

즉, ‘천제’라는 명칭이나 개념 속에는 ‘천자(天子)’나 왕이 행하는 국가(제국)차원의 제천의례라는 의미가 은연중에 함축되어 있다. 일찍이 동양문화권에서는 하늘의 천명에 따라 국가의 흥망과 왕권이 정통성이 성립된다는 믿음으로 인하여 국가 차원에서 하늘에 올리는 제천이 국가 제 1의 사전제도(祀典制度)로 구축되어 왔다. 봉권왕조가 몰락하는 근대까지 그 천명성은 위력을 발휘하였다. 따라서 정치적인 상징성이 천제라는 이름을 붙이는 순간 커질 수밖에 없다. ( 중략 ~)

 전라남도 장흥군 부산면 호계마을의 천체를 주목하는 이유

이 마을은 대외적으로 ‘별신제’로 알려져 있으며 마을에서 내려오는 <<別神祭祭>>등 문적들에는 ‘별신제’가 공식명칭이다. 천제라는 말은 이들 전적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하느님에게 제사를 모시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래서 ‘천제’라는 말을 오히려 많이 쓰고 있다.

천제의 제례절차 또한 유별난 면이 있다. 조선시대 국가차원의 사전(祀典)을 정리해 놓은 <<국조오례의>>의<길례>절차와 거의 동일한 유교식 절차가 중심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제장의 구성은 중화주의를 낳게 한 첫 제국 진나라의 교사(郊祀)와 한무제 때 처음 시행된 분음후토의 성격까지 일면 엿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의 풍물 굿인 군고(금고)가 유교식 의례제장(祭場)과 신격이 천문에 바탕을 두고 구성돼 있다.

고대에서부터 근대까지 국가 차원의 제천의식은 천문에 의해 그 천명성이 크게 논리화 되었다. 제천의 주신(主神) 논쟁이나 제천 제장(祭場)의 위치, 제천 거행시기 같은 제천제도의 여러 부문이 천문방위 또는 천문역법학에 기초를 둔다. 더구나 천문·지리와 관련된 신격들이 제천의례 신단(神壇)의 대부분을 차지한 사실을 고려해 본다면, 천문적인 접근은 국가제천의례의 역사를 이해하는데 매우 긴요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호계마을은 천명관이 배어있는 천문사상을 바탕으로 천제를 지내왔으며, 이를 공식적으로는 별신제라고 하였다. 이는 ‘별신제’에 대한 그간의 이해에서 천문과의 상관성, 그리고 그 중요성을 제기한다. 아울러 기존 별신제제 와 별신굿에 대한 이해와는 다른 또 다른 성격의 별신제를 상정할 수 있는 단초도 제공한다. 실질적으로는 ‘천제’라고 인식한 이 마을 사람들의 뜻과 바람을 통해 전라도 서남해안지대에 분포한 여러 별신제를 이해하는데 크게 기여하리라 본다.

호계마을 별신제를 구성하는 천문

 호계마을에는 2개의 대동치성이 있었다. 별신제와 당산제이다. 별신제는 300여년의 역사로 추정하며, 당산제는 100여년의 역사로 추정한다. 당산의 생성과 제의의 시작이 별신제보다 훨씬 후대이다. 신심에 있어서도 당산할아버지나 당산할머니와 같은 관념이 없다. 당산제를 부대적인 것으로 인식한다. 2003년 이후 폐지된 상태다. 결국 별신제가 호계마을 주민들의 절대적인 신심과 역사성을 여전히 대변하고 있다.

호계별신제는 매년 거행된다. 매년 주기적으로 거행되는 마을 굿과 차이가 없다. 별신제라는 명칭이 붙음에도 불구하고 몇 년 단위로 특별하게 거행되는 경상도나 강원도 해안가에서 거행되는 별신제와의 차별성에 주목하기도 한다. 정월보름 자시를 중심으로 별신제가 거행된다. 정월 14일 오전에 제장을 준비하여 저녁에 1경부터 5경을 도는 것으로 본격적인 치제가 이뤄진다. 오경이 끝나면 풍물패를 앞세우고 제관들이 제물을 준비하는 장찬집으로 가서 제물을 가져와 진설한 다음, 국조오례의의 길례 절차에 준해서 치제가 치러진다. 제례절차가 다 끝나면 다시 장찬집으로 자리를 옮겨 음복에 들어간다.

이처럼 별신제의 중심의례는 정월 보름 자시를 중심으로 이뤄지지만 정월초이레 마을회의가 소집되면서부터 실질적인 별신제가 시작된다. 마을회관에서 초이렛날 거행되는 마을회의에서 제관을 선정하게 된다. 이 때 선정되는 제관은 21명 정도가 선출된다. 초헌관(1), 아헌관(1), 종헌관(1), 집례(1), 축관(1), 장찬(掌饌;1), 전사(典祀;1), 찬인(贊引;2), 장생(掌牲;1), 포진(脯陳;6) 등 21명이다. 거(각 반장)를 담당하는 반장은 당연직으로 선정되기 때문에 마을회의 제관 선출에서 제외된다. 이들을 선정할 때는 특별히 생기 복덕을 보지는 않지만, 별신제를 모실 사람들은 초상집에 가지 않으며, 초상집에 다녀온 사람은 별신제에 참여하지 않는다. 풍물을 칠 사람은 따로 선정하지 않고 유고가 없는 사람들이 참여하여 굿을 친다.
제관이 선정되고 나면 과거에는 정월 초열흘 경에 당샘을 팠다. 별신제를 모실 냇가 자갈밭에 깨끗한 곳을 골라 조금만 파면 물이 나온다. 당샘은 금줄을 쳐서 잡인의 접근을 막아 장찬만이 그 물을 사용하도록 하였다.

제물은 대보름에 가장 근접한 장흥읍 장날에 나가 구입해 온다. 제비는 마을 대동계에서 관리하는 별신제답(500여평)의 수익으로 충당한다. 정월14일이 되면 아침부터 제장을 설치하게 되는데, 제일 중요한 준비가 대나무가지 28개를 준비하여 제장인 동네 중심을 흘러가는 냇가 자갈밭에 원이 되게 세워 금줄로 엮는 일이며, 그 중심에 흐리상을 설치하는 것이다. 또 제장 주변에는 제관들이 머물면서 그날 사용할 축문을 베계 쓰도록 하기 위하여 차일을 가설한다. 축문은 오경을 돌고 있는 동안 차일 밑에서 직접 쓰게 된다. 아울러 밤의 찬기를 이겨내기 위해 대형 모닥불을 한 쪽에 준비한다.

과거에는 인근 장동마을과 만수마을이 합동으로 모시던 별신제였다. 그러나 1914년 일제에 의해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용계면이 부산면과 장동면으로 분 면되면서 용계면에 같이 속했던  세 마을이 부산면(호계동)과 장동면(장동, 만수동)으로 각각 분리되면서 차즘 멀어지게 됐고 현재는 호계동만 지내는 별신제가 됐다.

세 마을의 공동 제의였던 별신제가 공식적으로는 천제라고 지칭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주민들의 의식 속에는 천제로 각인되어있다. 단순히 천제라고 지칭하는데 그치지 않고 제장을 설치하는 대나무 28개는 하늘의 28수()를 뜻한다고 믿고 있으며, 제상으로 쓰이는 흐리상에는 3분의 신위(神位)를 모시게 되는데 이들 신은 천·지·인(天地人) 삼신(三神)으로 여긴다. 주민들의 신관(神觀)과 제장 구성에 투영된 천문지식이 여전히 전승력을 갖는 점에 주목하게 되면 별신제의 천문적 요소 규명은 선결조건이 된다.

호계마을의 별신제에 나타나는 펀문 요소는 제장구성에서부터 드러난다.
제장은 매년 별신굿을 거행하는 당일에 설치한다. 흐리상이라는 제상을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28개의 대나무를 바닥에 빙 둘러 꽂아 박은 다음에 왼 새끼줄로 전체를 엮어낸 모습이다.
대나무는 생목을 밑동에서 잘라낸 다음, 꼭대기 부분만 대가지를 살려두고 밑가지들은 쳐낸 모습니다. 이는 영기를 만들거나 농기를 만들 때의 제작방법과 동일하다. 이 지역무굿에서 사용하는 나림대(손대)와 크기만 다를 뿐 같은 재료와 형상이다. 즉 신대임을 알 수 있다. 신의 강림을 받아 줄 대이다. 신대를 왼새끼로 연결했다는 것은 신의 강림에 부정을 가려 놓았음을 알 수 있다. 동시에 전체적으로는 하나의 원을 만들어 내는 효과도 얻는다. 결국 하나의 개념을 갖는 28개의 신대를 직각으로 세워 하늘을 향해 꽂아 놓았다는 것은 28분의 신을 모셔드리겠다는 의지로 해석된다.

제장은 성소(聖所)이다. 성소가 원을 형성하고 있다.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우주론에 입각할 경우 원은 하늘(天)을 상징한다. 하늘에 있는 신으로서 28개가 하나의 묶음을 갖는 존재는 성신(星神)으로서 28수일 수밖에 없다.

28수 천문관이 그대로 투영된 제장구성임이 분명하다. 28수로 된 천구를 조성해놓은 모습이다. 천구 안에는 땅을 상징하는 구조체와 구성도 함께 마련되어 있다. 바로 흐리상의 바닥이다.
원 안에 설치하는 흐리상은 굵은 대가지를 쪼개서 만든다. 먼저 크기가 20cm정도 전후의 막돌을 모아 1단으로 단(壇)을 만들었는데 4각형()이다. 단 네 모서리에 흐리상의 네 발을 세운다. 강바닥에 설치하는 흐리상의 위치로 보거나 천원지방의 우주론에 입각해 볼 때 흐리상의 크기만큼 설치한 4각형의 단은 땅(地)에 대한 상징으로 보인다. 그 단 위에 단의 크기만큼 다시 신께 올리는 제단이 꾸며진다.
 

그런데 호계별신제의 제장구성은 천원지방에 입각한 천지(天地)만을 천문에 입각하여 구성하지 않았다. 또 다른 상징체계와 세계관이 덧붙여져 있다. 이는 제단 역할을 하는 흐리상의 윗부분에서 발견된다.
흐리상의 제작 양상을 보면, 단의 네 모서리에 가는 통나무를 세워 틀을 만든 후 제물이 올라갈 바닥은 쪼갠 대가지를 엮어 펼쳐놓았다. 그것으로 마무리를 짓지 않고, 바닥 위쪽의 3면은 테두리를 올렸으며, 제관들이 술잔을 올리게 될 쪽은 터놓았다. 이는 유교 제사에서 신주나 혼백함을 올려놓는 교의(交椅)와 그 형태가 유사하다. 그러나 기능상으로는 제상(祭床) 역할을 겸하고 있다. 교의와 흐리상을 비교하면서 특히 주목하게 되는 점은 그 모양새이다. 교의의 경우 높은 의자 모양을 하고 있으며 팔걸이가 있다. 그래서 형태상으로 직각과 4각형이 기본 골격을 이룬다. 그러나 흐리상은 이 점에서 교의와 다르다. 교의의 팔걸이에 해당할 부분을 사선으로 처리하였기 때문이다. 흐리상의 팔걸이 모양새는 삼각형을 형성하게 된다.                                   
굳이 사선으로 처리하여 삼각형을 만든 감각에 주목하게 되는 것은 호계마을의 세계관과 의지가 투영되어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즉, 비슷한 기능과 형태를 갖는 교의와 흐리상이 세밀한 부분에서 미묘한 차이점을 보이는 것은 사용목적과 기능에 비춰볼 때 신관과 세계관의 차이를 드러내기 위한 의지의 표현일 수 있다. 사소한 차이일 수도 있는 부분을 선택하여 변화를 준 것은 뭔가 드러내놓고 자신의 신앙과 사상을 표출할 수 없는 상황이거나, 힘의 한계에서 나타날 수 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이 추론에 대한 단초는 흐리상에 나타난 도상의 상징성과 흐리상 제작법에 투영된 수리체계의 사상성에서 발견하게 된다.

좀 더 세밀하게 흐리상의 형태를 살펴보면 이 추론에 접근해본다면, 신주와 신게 올릴 제물을 정성껏 올릴 흐리상의 테두리를 3면으로 쌓아 올리되 그 모양은 삼각형(2개)과 사각형(1개)의 합으로 구성하였다. 양 측면은 삼각형으로 만든 반며, 향벽설위(向壁設位) 쪽 배면(背面)은 사각형을 이루도록 하였다. 도형상으로는 4각형과 삼각형, 수리체계로는 4와 3의 조합이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팔걸이부분에 해당할 삼각형의 면을 3개의 대나무쪽(조각)을 사용하고 있다. 3개가 한 점에서 부챗살 모양으로 퍼져나가는 형상이다. 결국 신주와 제물이 올라갈 흐리상의 윗면은 삼각형과 ‘3’에 대한 수리감각, 혹은 인식체계가 투영됐음이 드러난다.

정리를 해보면, 신이 드실 제물을 받치는 바닥(흐리상에 제물이 올라가는 바닥)을 경계로 위쪽은 삼각형과 3이 중심을 이루고, 그 밑은 4각형과 4가 중심을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방각이 천지인을 상징한다고 보는 인식체계에 맞춰 비춰본다면, 흐리상은 방(方)과 각(角)을 동시에 갖고 있는 상태다. 즉 땅(제단)과 접히는 흐리상의 아랫부분은 땅(地)을, 신주(위패)와 제물이 올라갈 흐리상 윗부분은 사람(人)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는 해석이 가능해진다. 하늘(28수)을 상징하는 원(천구)의 중심에 땅과 사람을 상징하는 흐리상을 배치함으로서 천지인이 모두 있는 우주를 구현해 놓은 셈이다. 결국 제장(祭場)은 천인감응사상에 입각하여 천구로 조성하되, 천지인 삼잭관이 투영된 상징체계를 갖도록 하였다.
 

천지인이라는 인식체계와 그 우주관을 천문에 바탕을 두고 제장을 구성한 호계마을의 별신제는 천제라는 의례를 집전하기 위해 진설하는 제물에도 천지인이란 우주관을 투영시키고 있다. 3이라는 수리체계와 신관(神觀)과의 결합을 통해서이다.

제물을 살펴보면, 백설기 시루 하나가 오르고 흰 가래떡 접시가 3접시 오른다. 그 다음 줄은 무가 3접시 오르며, 그 다음 줄에는 5곡(나락, 보리, 콩, 팥, 목화씨)을 각각 담음 다섯 개의 접시가 오른다. 그 다음으로 대추, 밤, 곶감 3접시가 올라간 후 마지막으로 술 석 잔이 올라간다. 제물은 신이 드실 음식이다. 그 음식의 종류와 수리체계에는 신의 성격이나 실체를 가름할 수 있는 상징이 담겨있게 마련이다. 대표적인 음식이 술이다. 술이 3잔 올라감으로서 신은 3분임이 들어난다. 3분의 신은 ‘신(三神)’이라는 일반적인 용어로 환치될 수 있다. 문제는 신격으로서의 삼신이 구체적으로 어떤 성격의 신인가로 귀결되게 된다. ‘삼신’이라는 용어는 민간에서 익숙하게 접했던 신격이기 때문이다. ‘삼신’이라고 부르는 순간 단순히 3분이기 때문에 ‘삼신’이라는 의미를 벗어나 다양한 함의를 제기하게 된다. 산육신(産育神)으로서의 삼신할머니, 천지인 삼신으로서의 삼신, 환웅·환인ㆍ단군을 지칭하는 삼신 등 다양한 삼신이 대두될 수 있다.
호계 별신제의 경우 삼신은 천지인 삼신으로서의 성격을 갖는다. 우선, 흐리상과 제장제작의 상징성에 투영되어 있는 상징체계의 연장선에서 대면하게 되는 삼신이다. 천지인산신과는 다른 삼신을 상정시키기 힘들다.

이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3분의 신은 바로 천지인 3신이라고 구체적으로 적시하면서 지금도 굳게 믿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인식과 믿음이다. 잔대(盞臺) 3개가 천ㆍ지ㆍ인을 뜻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으며, 그에 맞춰 떡 3접시와 무 3접시를 올린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을 단순히 주민들의 주장에 불과하다고 거부하기에는 흐리상과 제장제작의 상징성과 분명하게 일맥상통하고 있다. 둘째, 별신제 축문에서 적시하고 있는 별신의 신격이 이법(理法)으로서의 신격이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의 신관이 배어있는 신격일 경우, 삼신은 삼재론에 입각한 삼신인 천지인삼신이 된다. 호계마을은 유학자들이 대대로 세거해온 반촌이라는 점에 주목하면 천지인으로서의 삼신을 부정하기 힘들다.

종합해 보면 제장을 구성하는 근거와 원칙을 28수 천문관에 입각하여 천구를 조성한 후에, 흐리상이라는 제단을 천구의 중앙에 설치하면서 흐리상의 형상, 그리고 제작기법을 통해 땅(地)과 사람(人)을 상징하도록 하였다. 이는 천지인삼재의 우주관과 세계관을 구현해내는 효과를 보고 있다. 이를 3이라는 상수(象數)와 수리체계로 결합시켜 별신제의 제물진설원칙에도 투영시킴으로서 천지인 삼시능로 신격화시키는 확실한 결과를 얻고 있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별신(別神)을 모실 의례공간을 28수천문관을 바탕으로 한 천문체계와 결합시켰으며, 별신님이 하강하여 흠향하실 곳, 즉 제상을 천구의 중심에 위치시켰다는 점이다. 동양의 천문도 중에서 28수로 형성되는 천구의 중앙에 위치하여 그 중심을 잡아주는 별자리는 바로 북극성이다. 북극성을 삼성(參星)으로 인식하는 천문관은 고구려와 고려의 천문도에 나타난다.
 

중국의 천문도에 나타난 북극성은 ‘북극5성’으로서 확연히 다른 독자성이다. 고구려와 고려의 천문관이 조선중기에 형성된 호계마을의 천문관이나 신관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 이 점은 유가의 사상과 주역의 개념을 동원하여 표현하고 있는 호계별신제축문의 별신(別神)을 해석하는데 있어 주요한 기준을 제공한다는 판단이다.
전통의 의례에서 예로부터 우리 민초들의 삶과 애환이 천제를 통해서 마음에 위안과 집안의 화평을 바라는 간절한 심사를 읽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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