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 안중근(1879~1910)’을 모신 해동사(海東祠)의 창건 배경과 주도자에 관한 관심도 높아진 것 같다.

-의산 안홍천(義山 安洪天, 1895~1994), 자 자윤, 竹山 안씨.
1955년에 해동사(海東祠) 창건을 주도했다. 그가 받아온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 ‘해동명월(海東明月)’에서 海東祠가 유래했다한다. 海東은 ‘만절필동(萬折必東)’의 東과도 상통할 것. 그 친필은 경무대 앞에서 ‘안홍천’이 1인 시위를 한 결과라는 구전도 있다. 당시 문교부장관과 전남지사, 성균관전학, 安의사의 조카들도 참석했던 봉안식 행사였다고 한다.
1960년에 義山은 광주공원에 ‘안중근 의사 숭모비’를 세웠다. 그는 1970~71년경에 장흥향교 12대 전교(典校)로 활동하였다. 말년에 거주했던 장흥읍 행원리 고택은 사후 처분되었다. (남평문씨 문장현의 첫째와 넷째 사위의 아들인 안홍천과 필자 선친은 이종사촌으로 왕래하였다) ‘義山 안홍천’은 몇 독특한 선택을 했다. 그는 竹山人 장흥출신임에도 順興人 해주출신 안중근을 이례적으로 모셔왔다. 동성동본(同本)이어도 지파가 다르면 추숭현창을 외면하기 쉬운 현실인데도, 동본동향도 아닌 '해주출신 順興人'을 장흥땅 竹山人 사우 경내에 모셔왔다. 대승적(大乘的) 차원의 大義가 최우선이었을 것. 천주교 신자였던 안중근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海東祠가 전국적으로 유일하다.
다음, 義山은 수집고서 2850여권(741종 2291책, 고문서 555점)을 1973년에 국립중앙도서관에 일괄 기증하였다.
‘義山문고’로 명명된 기증내역에는 흥미롭게도 무려 10권 <사마방목> <문과방목>이 있는데, 아마 장흥과 보성 연고의 급제자들 <방목>일 것 같다. 확인해볼 필요도 있겠다. 한편, ‘효당 김문옥(1901~1960)’은 “여경재 贈의산안홍천”에서 ‘풍상백수(風霜白首)’ 처지에도 가력(家力)을 경주하여 조상숭모를 다했다”고 상찬했다. 장동면에 있는 만수사(萬壽祠) 안씨 사우도 기실 義山이 나서서 1951년에야 세웠던 것. 만수사에는 '안향('순흥인'이다), 주세붕'과 ‘죽산안씨 장흥 입거조(入居祖) 삼대’와 ‘동애 안중묵’을 모셨다. 1983년에 義山 선생의 공적을 기린 추선(追先)기적비가 세워졌다.

-안중근 기념사업 추진에 관한 소견이다.
‘의향(義鄕) 장흥’ 연장선에서 海東祠를 재정비하되, 특색이 있는 작은 기념관 정도를 세우면 어떠할까?
콘크리트건물 허우대만 있을 뿐 그 전시물도 관람객도 없고, 관리유지도 어려운, 과시성 사업이 우리 주변에 비일비재하다. 서울의 안중근기념관과 백범기념관의 운영현실도 관광객 수입과는 거리가 멀다. 한번 가보시라. 전국 60개 독립운동관련 기념관 중 국가예산을 지원받는 5곳 말고는 그 유지관리가 쉽지 아니하며. 지방관광 사업으로 빛을 내는 기념관은 거의 없다. 이른바 안중근 관광사업 역시 신중해야한다. 과연 장흥군 같은 지방자치단체가 직접 나서서 중국현지조사와 영화제작 등을 해야만 安의사 존숭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 될까? 海東祠를 창사한 본래 뜻도 아닐 뿐더러, ‘과유불급 주객전도(過猶不及 主客顚倒)’일 수 있다. 제안해본다. 안중근과 그 단지(斷指) 동지들을 한 자리에 모시고 본래적인 추숭선양(追崇宣揚)을 다하면서, 부차적으로 安의사 유묵(遺墨)을 중심으로 ‘우국지사’와 ‘만고역적’의 글씨를 대비하는 자료전시관을 병행함은 어떠할까? 역적 ‘이완용, 이두황’ 등 글씨도 함께 전시하자는 것. 그 필체가 그 인격이었던 인간 안중근을 흠모하는 분들과 남도 일대의 청소년 학생들 체험을 위한 ‘안중근과 우국지사 글씨 자료관’을 생각해본다.
장차에는 ‘휘호(揮毫), 서각(書刻)’ 대회로 발전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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