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리포진(鎭)은 1521년에 강진현(縣)의 완도에 설진되었다. 일환지지(一丸之地)라 했으니, 환도(丸島)와 莞島 유래가 상통할지 모르겠다. (완도郡은 장흥과 강진에 부속된 섬들을 모아 1896년에야 창군되었다.)
전라우수영에 속한 가리포鎭 첨사(종3품)는 주변 6곳 만호(종4품)를 관장하였다. 첨절제사鎭 가리포는 1555년 을묘왜변 침략을 당하였고, 그때 장흥부사 '한온'과 부장 '백세례(기산8문장 백광성의 부친)'가 순사하였다. 역대 인물 중에 '이순신'은 가리포첨사 직함을 거쳐 전라좌수사가 되었고,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영남' 가리포첨사가 있다. 그 가리포鎭 첨사를 지낸, 장흥 출신 5인 무장들이 있다.

-경민 변홍달(卞弘達, 1559~ ),초계 변씨. 1598년12월~1601년 가리포첨사.
1589년 무과갑과 2위. 7도 병사수사를 역임한 '월산헌 변국간(1527~1591)'의 아들. (여수 진남관에 '변국간 선정비'가 있다.) 변홍달은 칠천량 패전을 이순신에게 최초로 보고했고, '이항복'이 쓴 <故통제사李公유사>에 충무공을 모신 고금도 사당 건립사업에 참여한 '가리포첨사'로 나온다. 왜란 당시 '흑면 비장군'으로 불린 李충무공의 측근. 초계 변씨 형제들 중 가장 빛났다. 안양 비동 출신으로 비동 8장사이다. 또한 '변국간, 변홍달, 변덕일'은 장흥 땅 무반가 3대이다. 그 '몰년 1597년'으로 된 일부 기록은 잘못된 것.

-자용 위대기(魏大器,1555~1607?).장흥 위씨. 1605년11월~1606년12월 가리포 첨사.
1583년 무과. 임진왜란 권율 장군 부장으로 '이치' 전투 승리, 해남현감을 거쳐, 李충무공의 조전장 선봉장으로 여러 해전에도 참전. '홍면 비장군'으로 불렸다. ‘황진’ 장군과 함께 육전 참전을 거듭 했고, 9척 장신에 800근 활이라 했다. 충청수사로 부임하기 전에 타계하였으며, 장흥 행원리 석천사(石川祠)에 배향되었다. 투구 유물이 남아있다. 선무원종일등훈.

-모헌 임영립(林英立,1566~1617),진천 임씨. 1610년7월경 가리포첨사.
1591년 무과. 李충무공 측신. "입즉참모 출즉선등(先登)"으로, 李충무공과 함께 11전11승이라 했다. 안양 비동 출신. 조선수군 재건에 나서는 이순신을 호종한 최초 9명 측근에 들어간다. “노량 귀함(龜艦)선봉장”이라 외치며 1604년 당포해전에 참전했고, <당포승첩도>를 하사받았다. 함평 현감. 李충무공과 ‘반곡 정경달’을 모신, 장동 반계사(盤溪祠)에 추배되었다. 선무원종훈. 존재 위백규 선생이 쓰신 <모헌林公행장>이 남아있다.

-만회재 위정철(魏廷喆,1583~1657),장흥 위씨. 1633년2월경 가리포첨사.
1603년 무과. 3대무과 무반가로 ‘위덕화, 위정철, 위동전’으로 이어졌다. 1631년 병조참판 직함의 회답사(回答使)로 후금(後金) 심양에 다녀왔으며, 41일간 사행기록 <심양 왕환(往還)일기>를 남겼다. 1636년 영흥부사 겸 함남방어사, 이후 숙천부사, 갑산도호부사, 만포진 절제사를 거쳤으며, 관산 죽천사(竹川祠)에 배향되었다. 훗날 의주 통군정에 들린 손자 ‘간암 위세옥(1689~1766)’이 ‘갑옷에 말 타고 북방 벌판을 오갔던 위정철’을 회상하며 눈물지었다. 위정철이 후금 태종한테 받아온 ‘옥퉁소, 철피리’가 장흥 방촌유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징서 김수하(金壽河,1652~1721), 영광 김씨. 1710년10월경 가리포첨사.
1676년 무과, 장흥부 천곡(泉谷), 즉 장흥읍 평화리 출신으로 짐작된다.. <정묘지,1747>에 부동방 인물로 나오며, 여산도호부사를 역임했다. 조부 김여정은 경흥부사를 지냈고, 아들 김하귀(1683~)도 1718년 무과 출신. 1722년11월경에 장흥 여정에 나선 '담헌 이하곤(1677~1724)'이 고을동쪽(州東) 泉谷里에 있는 김수하 집을 찾았다가 지난 겨울에 타계했음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그 아들 김하귀와 함께 인근 십리에 있는, ‘문씨 부춘정(富春亭)’을 구경했다. 이하곤의 호남기행기 <남유록>에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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