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과 강진, 언뜻 비슷하고 가까운 이웃이어도 그 속은 꽤 다른 부분이 있다. 100년여 前, 같은 시기에 태어난 장흥 출신과 강진 출신을 대비해 본다. 줄여보면, 관료 분위기와 상업적 풍토의 차이일 것. 부사고을 전통의 장흥에는 법원이, 병영상인 전통의 강진에는 은행이 먼저 들어섰다. 장흥 천석꾼이요, 강진 만석꾼이라 했다. 지금은 또 사정이 꽤 달라졌지만 그때는 그랬었다.

-장흥 출신, 같은 1903년생.
최상채 박사와 김두헌 박사. 장흥읍 출신, 장흥 보통 공립학교 동창생들.
그들 두 박사(博士)는 같은 무렵에 국립 대학교 초대 총장이 되었다.

-남강 최상채(南崗,1903~1973) 탐진 최씨, 경성제일고보, 경성의학전문, 일본 경도제대 의학박사, 경성의전 외과교수, 전남대 의대교수, 전남대 초대총장, 근대호남 100대 인물, 4ㆍ19후 정계 진출, 제5대 국회의원(참의원). 장동면 만수리에 묘소가 있다.

-예동 김두헌(汭東, 1903~1981) 김해 김씨, 대구고보, 일본 동경제대(윤리학과), 진단학회 상임위원, 혜화전문교수, 서울대 철학과 교수, 전북대 초대총장, 서울대 문학박사 1호, 학술원 종신회원, 저서로 신동아가 선정한 100대 도서에 들어간 <조선가족제도연구>가 있다.
가히 장흥 인물들이고, 그 옛 시절에 대단한 경력들이다. 광주에는 '남강로' 거리가 있고. 전남대에는 최상채 박사 동상이 있다. 김두헌 박사의 호 '예동(汭東)'은 장흥 예양강 동쪽 출신임을 말해준다. 친일논란이 있었으며, 재경 장흥향우회장도 역임하셨다.

-그 시절 다른 곳, 같은 1903년생들. 그들 분야에서 일가를 이루었지만, 1903년생 문인 이은상(마산)은 친독재 시비, 소설가 김기진(청원)과 동요작곡가 윤극영(서울)은 친일행적 시비가 뒤따른다. 시대적 질곡이었을 것. 1903년생으로 학자 양주동(개성), 정치인 서민호(고흥), 실업인 장기영(영월)이 있고, 1904년생으로 정치인 정일형(용강)도 있다.
-강진 출신, 1903년생.
시인 김영랑과 시인 김현구. 강진읍 출신, 강진 보통 공립학교 동창생들.
그들 두 詩人은 강진의 ‘시문학파 기념관’에 재조명되었다.

- 영랑 김윤식(永郞, 1903~1950)? 김해 김씨, 조선중앙기독교회관 수강, 휘문의숙, 강진에서 3ㆍ1운동, 1919년 대구형무소 옥고, 일본 청산학원(영문학과), 시문학파 활동, 제헌국회의원 낙선, 공보처 출판국장, 9ㆍ28수복 때 사망, <영랑시집> <영랑시선>

- 현구 김현구 (玄鳩, 1903~1950)? 김해 김씨, 배재고보 중퇴, 일본유학 중도귀국, 시문학파 활동, 강진읍사무소 직원, 6ㆍ25 인민재판 절명, 유고시집 <현구시집> (1904년생으로 보기도 한다.)
덧붙인다. 벌써 100년여 前, 같은 1903년생, 같은 남쪽의 장흥과 강진 인물들이다. 그 우열(優劣)에 상관없이 퍽 대조적인 인생행로이며, 출향(出鄕)출세(出世)의 의미를 되돌아보게 한다. 그 시절에도 시골소년들이 품었을 부중치원(負重致遠)의 포부는 당당했을 것이나, 노년의 상념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고향의 기대와 고향에 대한 보답은 종종 어긋나기만 하고, 누구에게든 늘 어렵다. 누구는 망각되고 누구는 기억된다. 상전벽해(桑田碧海) 세상사 앞에서 그 출신과 고향은 잊혀지고, 귀향(歸鄕)은 멀어져가고, 고향(故鄕)은 '영영 떠나온 곳'이 되고 만다. 그럼에도 ‘고향으로 돌아오는 江’을 건너 고향 땅에 드러누운 이청준(1939~2008) 선생님에게 그 문학관 제자리를 마련하지 못함에 송구스럽기 한량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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