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위백규(1727~1798) 선생에 대한 평가기준은 사람마다 상이할 것. ‘실학자론, 경학자론, 천재론’ 등 여러 관점이 있을 터. 그 훌륭함은 필자에게도 분명하나, 선생 실체에 상응한 자리 매김 작업은 늘 어렵게만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첫 이유는 삼벽(三僻) 역경 속에서 평생 성실하게 분발했던 태도이다. 거듭되는 낙방과 곤궁, 사회적 울분 속에서 그 신념을 견지하며 내내 노력하셨다. 이른바 三僻 신세의 불우(不遇)함을 남 탓으로 돌리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자포자기(自暴自棄)함도 없었다.
둘째 이유. 생활시편(生活詩篇) 부분이다. 선생은 경학(經學) 궁구에 몰두하면서도 주변 현실을 외면하지 아니했다. 직접 겪은 실농(實農) 체험에 근거하여 민생(民生)의 어려움을 절절하게 노래했다. ‘연시조 농가(農歌), 보리(麥) 연작, 구황작물 연작, 구황식품 연작, 연년행(年年行) 연작’ 등 농경詩 생활시편이야말로 남다르게 탁월한 모습이요, 비교우위 쪽이라고 판단한다. 이른바 재도(載道)론적 詩文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그는 은거자 어부(漁父)인양, 산중처사(山中處士)인양 고고하게 행세하지 아니했고, 삼강오륜(三綱五倫) 타령으로 시종하지 아니했다.

셋째 이유는 선생의 산문 때문이다. <읍지 정묘지>등 향토지 정리에 적극 참여했고, 선현 인물들에 관한 “행장, 유사, 기(記),전(傳), 제문(祭文), 축문(祝文), 묘갈, 묘표, 편지” 등을 풍부하게 남겨놓으셨다. 물론 청탁을 받은 의례적인 글도 있으며, 하찮은 지방 인물에 대한 잡문이라 폄하할 수도 있으나, 향토인물에 관한 기억의 소중함을 본보기로 예증하신 것. 그분들의 실천적 행적을 구체적 자료에 터 잡아 요령 좋게 정리하셨다.

선생 붓끝에서 되살아난 사람들이 한두 분 아니다. "의도(義徒)金공(憲), 金장사(壯士,汝浚), 부정공魯공(鴻), 군수金공(漢一), 판서金공(億秋), 서곡林공(賁), 죽곡林공(誨), 성균생원李공(敏琦), 처사梁공(億柱), 가의吳공(信男), 뇌촌文공(成質), 간암처사魏공(世鈺), 모헌林공(英立), 절도사金공(孝信), 송강金공(景秋), 백초동(文參), 의사(義士)梁공(運壽)" 등이다. 또 강진, 영암, 함평, 나주, 남원, 구례 등 남도 인물들에 관한 글을 꽤 남겼는데, 그 인품과 필력이 널리 통하였음을 말해준다. 선현문집의 후서(後書), 발(拔)도 마찬가지이다. 선생의 <천방劉선생(好仁) 유고(遺稿)後> 덕분에 詩 "영소(詠梳)"의 작자로 장흥사람 '천방 유호인'을 되찾게 되었다. <여경화(餘慶花)說, 書죽산안씨門案後>는 ‘장흥, 보성, 강진’의 竹山安氏 3지파와 그 여경 후손들을 전해준다. <정수사 대웅전 삼존개금記> <나주 보산祠宇 예성祝文> <장흥객사(客舍) 중수記>로 그 시대상 단면을 알 수 있다. <처사梁공(億柱)행장>을 통해서 ‘가지 양억주, 영천 신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나아가 <반곡고매(古梅)記> <도산축문(禱山祝文)> <예예(泄泄)說> <祭망녀文> <祭계제(季弟)자면(自勉)文> <사자산 동유(同遊)記>등 산문을 통해 선생의 인생관과 생활철학에 넉넉히 접할 수 있다. 대화체 "연어(然語)"를 비롯하여, 때로 직정(直情)적이고 직설(直說)적이기도 하지만, 당신 개인사에 수기(修己)적 차원에서 성찰한 詩, 업농자(業農者) 체험에 기반한 생활시편과 주변 사람들과 세상사에 대응한 산문 쪽이 <정현신보> <만언봉사>를 비롯한 치인(治人)적 차원의 경세시폐론(經世時弊論) 등에 비하여 존재 선생의 존재(存在)감을 훨씬 빛내주는 것 같다. 이제 존재 선생의 문학(文學)에 대한 총체적 접근이 필요한 때 아닐까싶다. 문학가(文學家) 존재 선생의 <문학연보(年譜)>부터 따로 만들어볼 것을 제안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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