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정유년 7월16일에 원균과 조선수군이 ‘칠천량’ 해전에서 대패하였다. 그 한달 후 8월19일 李충무공이 장흥 ‘회령포’에서 삼도수군통제사로 취임했으며, 장흥 의병향선(鄕船) 10척이 집결하였다.

다시 한달 후 9월16일에는 ‘명량대첩’ 승리가 있었다. 그 명량 울돌목에서 패퇴한 왜군들은 어디로 갔을까? 한편 8월16일에 남원성에서 승리한 왜군 일부는 전라도 남쪽으로 밀려왔다.
그해 정유년 10월에 우리 장흥 땅에서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첫 사건, 그해 10월10일에 안양 동계(東溪)마을이 쑥대밭이 되었다. 안양 기산 8문장, 동계 백광성(1527~1595) 선생의 대상(大祥)기일이었다. 그날 남편과 큰 아들이 참살을 당한 현장에서 金씨부인은 그 시신을 끌어안고(포시,抱屍) 칼로 자해하며 피를 흘리는 온 몸으로 항거했다. 영광金씨(1571~1660)는 월봉 김광원의 증손녀였다. <정묘지, 안양방> 편에 '열녀 金氏'로 나온다. 金씨 부인의 행적은 <동국신속삼강행실도,1617>에 "사인(士人) 백현남 妻김씨- 김씨포시(抱屍)"라는 제목으로 도판과 함께 수록되었다. 1670년에 그 정절을 기리는 '정려문'이 세워졌고, 1730년 중수와 1766년 이축을 거쳐, 1925년에 현재의 동계 마을 '청계재' 문루로 옮겨졌다. 한편 <수원백씨삼세삼강(三綱)록, 백봉흠,1958>은 을묘왜변(1555)에 참전 순사한 '백세례(1482~1555)의 忠, 그 홀로 된 모친을 위하여 대과를 포기하고 봉양한 아들 '백광성'의 孝, 정유재란 참화 속에 정절을 지켜낸 '며느리 김씨'의 烈을 합한, "삼세(三世)의 忠孝烈 삼강(三綱)"을 기록했다. 그 '충효열 삼강편액'이 동계 마을 '청계재 정열(貞烈)문'에 지금도 있다. 또한 같은 <정묘지, 안양방> 편에 '피난 중에 마주친 왜군에 대항하며 자결 순사한 열녀 李씨(창녕조씨 조장일 처)자매' 기록도 나오는데, 그 '원주 李씨 정려각(1613)'은 역시 안양 운흥리 상운마을에 있다. 자매의 정절을 “연방병미 일천춘(連芳倂美 一千春)”이라 기렸다.

둘째 사건, 그 10월경 무렵으로 짐작되는 '지포(芝浦)'해전이 있었다. 이때 '지포'는 안양 '지천포(芝川浦)'로 추정되며, 그 당사자들은 초계 변씨 형제들이었다. 고향 안양 일대와 東村에 침입한 왜적에 맞서려고 급히 돌아온 '변홍원, 변홍제'가 전사하고 말았던 것. 장흥 회령포에 오신 李충무공의 통제사 취임에 맞추어 의병향선 10척 집결을 ‘주촌 마하수(1538~1587)’와 함께 주도했던 '변홍원'이다. 그 '마하수'의 아들 마위룡이 그 변홍원의 사위였다. 그 동생 ‘변홍주’는 마하수의 사위였다. 같은 장흥 출신으로 한없이 당당했던 충신들의 혼맥(婚脈)은 그렇게 겹쳐졌다.

그리하여 이미 그해 9월 울돌목 명량대첩에서 순사한 ‘마하수’와 함께 그 사돈 ‘변홍원’도 그 정유년 10월에 ‘지포’에서 순사하고 만 것. 그런데 “그때 흑면장군 변홍달(1559~ )도 전사했다”는 일부 기록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정유재란 후 1598년12월~1601년에 '가리포 첨사'로 재직하였다.

세째 사건, 아마 같은 정유년 가을 무렵으로 짐작되는데, 강진을 통해 장흥읍 평장리 금안(金安)으로 침입해 온 왜적을 장흥지역 의병들이 매복 주둔의 위장술로 격퇴하였다. 그 일을 주도한 경주김씨 ‘오우당 김응원(1569~1638)’의 공적을 기려 1823년에 의병행적비 '각왜비(却倭碑)'가 평장리에 세워졌다. 금안마을 뒷산에는 당시 새겨졌던 '각왜동' 각자(刻字)가 있다. 김응원 선생은 1609년 사마시 입격자이고, 경주김씨 예남사(汭南祠)에 배향되어 있다. 그 각왜비기 '전남도 지정문화재(288호)'로 작년에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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