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위백규(1727~1798) 선생은 사마시 동년(同年)인 '참봉 유맹환'에게 71세에 보낸 편지에 ‘지벽(地僻), 인벽(人僻), 성벽(姓僻)’ 등 삼벽(三僻)을 토로했다. “해변가 빈한한 백성으로 늘 三僻을 제 분수로 삼았다(海岸寒民 每以三僻自分)”고 했다. 같은 장흥출신 처지에 일응 공감된다. 그렇다면 그는 종내 삼벽지인(三僻之人)으로 좌절하고 말았는가? 아니다, 그 三僻이 반전(反轉)되어 삼복지인(三福之人)이 되었던 것은 아닐까?

- “지벽(地僻)”은 그 출생 거주지가 궁벽한 오지라는 것. 서울 사람들은 ‘장기 (   氣)가 서린, 천애(天涯) 강남 땅’이라 말하며, 남쪽 끝으로 부임하는 장흥부사를 마치 사지(死地)로 내보내듯 상투적 송별詩로 전별했다. 그러나 “지복(地福)”이라 할 수 있다.

해변 천관산이 평생 반려인 듯 위로해 주었고, 오히려 궁벽 오지인지라 그 외로운 빛이 더 밝게 발할 수 있어 초야(草野) 인재로 등용된 것. 수도권 경기 인근 출신이면 불가능했을 일. 天冠山의 하찮은 부분까지 꼼꼼하게 남긴 <지제지>와 그 山에 절절하게 호소하는 ‘도산축문(禱山祝文)’에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는데, 벽지에서 평생 인내했기에 그런 기회를 얻은 것 아닐까?

- “인벽(人僻)”은 그 자질과 처지가 비루하고, 주변에 큰 사람 큰 그늘도 없고, 교제 범위도 좁았다는 것. 그러나 “인복(人福)”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조부 위세보(삼족당)와 부친 위문덕(진사)의 튼실함이 먼저 있었다. 그 조부는 ‘실옥자용(室屋自容), 전원자양(田園自養), 시서자오(詩書自娛)’의 삼족(三足)을 말했으니, 그래도 ‘실옥, 전원, 시서’가 있었다. 또 존재는 독경(讀耕)병행의 문중 사강회(社講會)를 주도하는 등, 종친사회를 이끈 리더십이 상당했다. 또한 충청도 덕산을 오가는 왕복 천리 길이지만 ‘병계 윤봉구(1683~1767)’를 스승으로 모실 수 있었다. 존재의 자질을 알아준 ‘장흥부사 이진의(1703~), 황간(1713~)’이 있었고, ‘호남위유사 서영보(1759~1816)’를 만난 것도 큰 행운이었다. 서영보는 추천 서계(書啓)에서 “위백규는 경전에 널리 통하고, 문중사람들을 잘 돌보아 사람들을 흠탄케 하였다.”고 말했다. 고립된 人僻 속에서 나름 여러 人福이 있었던 것.

- “성벽(姓僻)”은 ‘장흥 魏氏’ 집안이 희성 한문(希姓 寒門)이어서, 어떤 인물을 이끌고 밀어줄 여력이 부족했다는 것. 고읍 방촌의 魏氏는 무과 무반은 꽤 있어도 문과급제자가 없었다. “姓氏의 운수가 부족하여 400년간 3품 현관(顯官)을 배출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성벽(城壁)에 갇힌 姓僻이었다. 그러나 “성복(姓福)”이라 할 수 있다. 경화벌열에 비할 바 못되지만, 장흥의 토반 姓氏로 결속력과 역량이 있었으니, 사마시 생원에 그쳤다 해도 향촌士族의 자긍심으로, 향촌長老 역할을 했다. 바깥 세정에 정통한 족숙, “간암 위세옥(1689~1766)”이 어린 조카 위백규를 인도했고, 사후에는 魏氏 후손 ‘다암 위영복’이 그 저술 대부분을 보전한 데서 오늘의 존재 선생이 있게 된 것.

요컨대, 존재 위백규가 선생이 ‘三僻 不憂’라 한때 그 신세를 한탄했지만, 그럼에도 촌학구(村學鳩)의 옹색한 신세를 벗어날 수 있었음은, 벽지 희성 한문(寒門) 출신이나마 재지사족(在地士族)으로 내내 성실히 분투 노력 했기 때문일 것.
존재 선생에게 걸림돌이 되던 三僻은 흐르는 세월 속에서 전화위삼복(轉禍爲三福)이 될 수 있었다. 그 시절 존재 선생의 三僻이 기억날 때면 우리 장흥사람들은 그 三僻 옆에 대기하던 三福을 함께 생각해볼 수 있으리라.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