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이번 역자(안대회)가 저자 이중환을 '사민(四民)평등론자, 사농공상 귀천차별 완화논자'로 간주함은 너무 성급한 해몽(解夢)이라 할 것. <택리지> 서론(序論)은 "천하에 가장 아름답고 좋은 것이 士大夫 호칭이다,

士大夫 행실과 의례로 가문을 보전하기 위함이다.“고 했으며, 그 결론(結論)에서 “이에 <士大夫 가거처>를 지었다"고 마무리했다. 그가 소개한 전화(戰禍)없는 福地吉地는 ‘사대부의 도피처’에 해당된다. 요컨대 <이중환 택리지>는 士大夫에 의한, 士大夫를 위한, <士大夫 택리지>에 불과하다. 그는 사람들의 땅과 그 人心풍수를 오직 士大夫 관점에서 ‘사대부人心= 善’, ‘서민人心= 惡(또는 非善)’이란 이분법적 결정론으로 구별했을 뿐이며, 그 땅과 그 사람들 사이의 개별적 상관성과 변전성에 대해 따로 고민하지 않았다. 그가 “평안도는 인심이 순후하기로 첫째이다”고 말했건만, 그런 평안도에서 홍경래 난이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士大夫 특권신분의 절대선(絶對善)을 추구했던 그였기에 애초부터 사민(四民)평등과 직업의 자유에 바탕을 둔, 다원론적 융합사고의 여지는 없었다. <이중환 택리지>가 오늘날 우리 사회에 미치는 교훈은 어떠할까? 그가 말한 경상도 지방에는 士大夫 100% 거주 지역이었을 뿐, 달리 農工商民 및 常民은 살지 안했다는 말일까? 이중환 시대에도 경상도 사대부 역시 많아야 30% 정도였을 것.

이중환은 정작 그 자신에 관련된 士大夫신분의 정치적 이권배분의 모순과 차별에 대해서는 신랄하게 비판했음에도 그 정치투쟁에서 소외되고 차별받는 여타 지역적 신분적 모순에 대해서는 눈을 감고 말았다, 개인적 오만함에서 비롯된 통찰력 부족으로 인하여 이른바 배타적이고 우월적인 士大夫人心론을 입론했을지 모른다. 그런 ‘士大夫人心론’과 ‘택리론’을 변별하지 못한 채, 칭송 일변도로 치우친 이번 <완역정본 택리지> 역자의 기능적 번역 태도가 몹시도 아쉽다.

  -부기1 <택리지>의 저자와 역자를 위하여, ‘붕당론(鵬黨論)’문구를 소개한다.

저자 이중환은 그 말을 하고 싶었을 것이다. “붕당(鵬黨)生 於쟁투(爭鬪), 쟁투生 於이해(利害), 이해切 기당(其黨)深, 이해久 기당固” (“붕당은 쟁투에서 생기고, 쟁투는 이해관계에서 비롯된다. 利害가 절박하면 黨派는 심해지고, 이해가 오래되면 鵬黨은 고착된다.”)

-부기2<택리지>에서 칭송하는 ‘여주 백애村’이 어디인지에 대해 이번 <완역정본>은 침묵하였는데, ‘백애(白涯) <배개 <배梨개浦 <이포(梨浦)’, 즉 ‘여주 이포(梨浦)’를 지칭한다.

-부기3 ‘정약용의 택리지 발문’ 관련

일부 전라도 사람들은 ‘정약용’의 ‘발(拔)’에 대해 서운해 한다.
전라도를 타박하며 경상도릍 추겨 세운 <택리지>를 두둔했다는 혐의 때문일 것. 오랜 유배기에 전라도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정약용이 이중환의 편견을 지지해줄 수 있느냐는 것. 그러나 남인 정약용은 남인 이중환의 책자를 ‘士大夫 가거(可居)론’으로만 받아들였기에 “士大夫거처 기준론에 따른 장원(莊園)이 아름답기로는 영남이 제일이다”는 소극적 응답을 했을 뿐이지, 달리 이중환의 여러 편견에 그대로 동조한 것은 아니겠다. (또한 이중환 式의 士大夫기준에 따르면, 전라도에 그런 士大夫거처가 적은 것도 사실 아닌가?

정약용은 전라도 士大夫 가문으로 ‘고경명, 기대승, 윤선도’ 세 집안을 거명했다. 또 전라도 땅에서 실제로 오래 살아본 그였기에 “호남은 풍속이 호협(豪俠)하기만 하고 질박(質朴)한 기질이 적다.”라고 능히 발언할 수 있는 일 아닐까?) 한편 정작 <8도 택리지>를 쓰기로 한다면, 6도 현장(現場)을 두루 체험하고 관찬지리서에 정통할 뿐더러 관료적 경험도 훨씬 풍부한 정약용이 적합할 것인데도, 그는 택리적 차원에서 사람이 살아가는 이치로는 “물길(用水), 땔나무(火木), 오곡(五穀), 풍속(風俗), 산천(山川)경치”라는 현실적 기준을 제시했고, 이중환式의 士大夫人心 기준론을 답습하지 아니했다. 기실 정약용式의 현실적 풍수지리 요체는 그 아들들에게 당부한 대로, “서울에서, 또는 서울 가까이에 사는 것”일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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