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호에 이어서

그런 이중환式의 士大夫 人心풍수가 반영된 <택리지> 한계가 가늠되는 몇 의견도 있다. (이번 <완역정본>에도 일부 자료가 덧붙여있다)

'위당 정인보(1893~1950)'의 "해제"는 <택리지>를 명저라 평가하면서도, "?단지 '택리서'로만 보면 격화소양이고, ?'지리서'로서 훌륭하다는 평가도 깊은 지음(知音)은 아니다. ?그 깊은 뜻 본지는? 士大夫 입장에서 사색당화의 폐해를 지적한 부분에 있다"고 직시했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의 "발(拔)"은 (인문지리적 실학 차원에서의 긍정적 평가를 따로 내리지 않고), 그저 "국내 士大夫 별장의 美惡을 논한 책"으로 받아들였을 뿐이다. 같은 남인 당색 士大夫로서 이중환이 놓친, 영남지역과 남인의 士大夫 집거처를 보완해주고 있다. 또한 이중환式 <택리지>가 칭찬한 '백애村'에 비하여 '미원村' 우위를 주장하는 반론을 덧붙이고, 그의 고향 거처가 士大夫 거주에 불리한 환경임에도, 자신이 고향을 함부로 못 떠나는 이유를 부언하면서, 이중환式 '士大夫 택리론'에 의문을 단다. 정약용은 이중환의 낮고 우직한 수준에 이모저모 실망했을 법하다.

<오주연문장전산고>의 저자, ‘이규경(1788~ )’은 "택리지 폐해가 기폐무궁(其弊無窮)"이라 했고, 풍수지리학자 ‘최창조’는 "저자의 개인적 편견이 너무 심하다"고 했다.
한편, <택리지>에 등장한 '장흥' 관련 부분도 소략했다. '가볼만한 山水- 천관산' 정도이다. "문장 인물 - 고부, 옥봉 백광훈"은 '장흥' 또는 '기봉 백광홍'에 대한 착각 또는 무지일 것. 영암의 동남쪽 바닷가 8고을(郡)을 한데 싸잡아 "서울에서 멀고,? 후덥지근하여 전염병과 장기가 생긴다...?일본과 가까와 토질이 비옥하더라도 살기가 좋은 곳이 아니다"고 단정했다.(또한 '해남 두륜사' 대신에 '해남 천주사'로 말했는데, '장흥 보림사'는 알 리도 없었을 것) 전라도에 정작 와보지도 아니한 이중환은 전라도의 人心평가와 지역소개에 박했지만, 인물소개에도 역시 박했다. '최부,박상,양팽손,유희춘,송순,임억령,양응정,임제' 등에 대한 언급도 일절 없다.

마무리 짓는다. <택리지>는 비록 生利와 경제 무역을 언급한 일부 장점에도 불구하고, 원제목처럼 '士大夫 가거(可居)지'에 그 중점이 있다. 士大夫 지위와 거처를 위협하는 사색당쟁 폐해를 비판하는 쪽에 그 본령을 두었기에 <택리지>는 인문지리서 측면보다 정치적 해명서로서 비중이 크다. 남인 패배자 이중환이 사색당쟁에 밀려 회복 못할 고초를 겪은 것처럼, 서울에서 한참 먼 전라도 역시 서울 패권다툼에서 내내 밀린데서 정치사회적 지역편견에 더욱 시달렸다. 그 지역적 정체성을 외부인들한테 늘 일방적으로 규정 당하고 만데서 그 전라도의 그 억울함이 큰 것이리라.

<택리지>는 몰락하여 옹색한 士大夫 이중환의 입장만 겨우 반영되었을 뿐, 이른바 士大夫 人心을 핑계 삼아 같은 정치지리적 공동체 구성원간의 소통 여지를 냉큼 잘라버리며, 사회적 갈등과 편견을 조장한 데에 그 치명적 결함이 있다.
경제 지리서로서 유통(流通)이든, 인문 지리서로서 소통(疏通)이든, <택리지>는 통합 폐색에 관한 성찰적 인문지성이 크게 부족하고, 그가 유람객이든 떠돌이이든 사색적 여행가로서 일말의 여정(旅情)과 관찰자적 서정이 전혀 없다.

지난 시절에야 '생선, 소금, 목화, 船商, 生利' 정도만 언급해도 어떤 근대성 맹아로 펑가 받을 수 있었다지만, 현금의 잣대 앞에서는 그대로 통용될 수 없는 단순 속견에 불과하다. 때론 불순해 보이는 일부 바람잡이들이 아니라면(그들은 늘 ‘지역인심’ 부분만 소개한다), “<택리지>는 보편성 잣대 앞에서 계속 살아남을 수 있는 책자는 아니다”고 판단한다. 단지 "그런 정도를 언급했던 그런 책자가 그 시절에 그렇게 존재했다"는 역사적 의미에 국한될 것. 이 시대에는 이편저편을 가르는 <색목(色目) 택리지>가 아닌, 상호처지를 이해할 <소통 통리(通里)지>가 필요하다.
장군 전두환의 한 가지 치적은 그나마 '광주~대구 88고속도로의 개통' 아닌가싶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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