夏日偶吟(하일우음)/구당 남병철
온종일 빗소리에 사립문 닫아 놓고
섬 뜰의 물이 갉아 풀뿌리 드러나서
정원에 앵두 맺히고 대 손수레 보았네.
雨聲終日掩柴門    水齧階庭草露根
우성종일엄시문    수설계정초로근
圓史近來修幾許    櫻桃結子竹生孫
원사근래수기허    앵도결자죽생손

장마철이다. 갑자기 오래 거들 떠 보지도 않던 정원 소식이 궁금하다. 미안해서 빼꼼히 내다보니 ‘저- 저런 세상에’ 앵두는 벌써 그 붉은 열매를 달았고, 대나무 새 순이 비 맞고 여기저기서 쏙쏙 밀어 올려 순주놈을 보았던 것으로 느꼈으리니. 그리고 그들은 가볍게 속삭였겠다. ‘저희는 아직도 끄덕없어 자라고 있어요’라고 말했을 것 같다. 정원의 일은 근래 들어 어떻게 되었는지 앵두는 벌써 열매를 맺고 대나무는 손자를 보았네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앵두는 열매를 맺고 대나무는 손자를 보았네(夏日偶吟)로 의역해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구당(鷗堂) 남병철(南秉哲:1817∼1863)로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호는 규재(圭齋), 강설(絳雪), 구당(鷗堂), 계당(桂堂)이다. 이조 판서와 대제학을 지냈으며, 박학하고 문장에 뛰어났던 것으로 알려진다. 수학과 천문학에도 뛰어났다. 저서에 <규재집>, <추보속해> 등이 있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온종일 내리는 빗소리에 사립문을 닫아 놓고 / 섬돌 뜨락 빗물이 갉아내어 풀뿌리가 드러났네 // 정원의 일은 근래 들어서 어떻게 되었는지 / 앵두는 열매를 맺었고, 대나무는 손주놈 보았구나]이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여름날 우연히 읊다]로 번역된다. 장마철을 맞아 진종일 비가 내린다. 사립문을 꽁꽁 닫고 그냥 방안에만 틀어 박혀있다. 마당에는 잡풀이 꾀 많이 돋았다. 찾는 사람도 없으니 굳이 뽑을 필요도 없겠다. 처마 끝으로 연신 떨어지는 빗줄기에 땅이 패여 맨 뿌리가 드러났다. 장마로 인하여 안쓰러운 모습을 보았다.
시인은 이와 같은 모습을 눈여겨보았으리. 그렇더라도 온종일 내리는 빗소리에 사립문 닫아 놓고, 섬돌 뜨락 빗물이 갉아내어 풀뿌리가 드러났음으로 시상을 일으킨다. 왠 종일 내리는 비에 찾아 올 사람도 없고, 찾아갈 집도 없었겠다. 누웠다 일어섰다 서성이는 지루한 장마철이었을 것이다.

 풀의 수난이 들이 닥쳤던지 빗물이 풀뿌리를 갉어냈다. 화자는 며칠 동안 뜸하니 보지도 못했던 정원의 일이 근래 들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했겠다. ‘아뿔사 이것 봐라’라는 말이 불현듯 나왔으리라. 앵두는 벌써 열매를 맺었고, 대나무 둘레에서 쏙쏙 올라온 죽순을 보면서 ‘손주를 보았네’라고 외쳤을 것으로 짐작된다. 대나무 둘레엔 키자랑을 하듯이 돋아난 죽순을 손자였다고 표현한 시상이 돋보인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빗소리 사립문 닫고 풀뿌리가 드러났네, 정원의 일 궁금한데 앵두열매 대나무 손주’ 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한자와 어구】
雨聲: 비기 주룩주룩 내리는 소리. 終日: 하루 종일. 掩: (문을) 닫다. 잠그다. 柴門: 사립문. 水齧: 물이 갉아먹다. 階庭: 계단의 정원. 草露根: 풀뿌리다 드러나다. // 圓史: 정원의 일(역사). 近來: 근래. 요즈음. 修幾許: 어떻게 되었는지. 櫻桃: 앵두나무. 結子: 열매. 竹生孫: 대나무 손자가 나오다. 곧 죽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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