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예양강 수심(水深) 정도로는 비록 장마철 홍수 범람은 있어도, 평시에 강진만 구강포(九江浦)와 장흥읍을 운송선이 오고갈만한 수로(水路) 역할을 감당하지 못했을 것. 독실포 명칭으로 미루어, 한때 예양강 사창(司倉) 흔적이 짐작되기도 하지만, 본격적인 대선(大船) 왕래 기록은 없다. 부산 부춘정 동강(桐江)과 그 부근 용호(龍湖)에도 작은 조각배 이상은 어려웠을 것. 

유배객 신잠(1491~1554)의 詩에는 예강 상류, 잣두 쪽으로 전개된 모래 사주(沙洲) 풍경이 곧잘 나왔다. 예강을 자주 건너며 장흥부사를 만났을 백광훈(1537~1582)의 詩에도 뱃길 모습은 없었다. 물길 이용사례가 전혀 없지는 않았다. 17세기 무렵 보림사 중창(重創)불사를 위한 재목을 예강 물길로 운송했다.(아울러 보성 정자강 쪽도 이용했는데, 뗏목으로 옮겼을 것.) 물론 예강 뱃놀이는 있었다. 유배객 심동구의 아들 심유(1620~1688) 詩에 배를 타고 적벽부를 노래하는 '예강범주(汭江泛舟)'가 등장한다. 장흥사람 백진항(1760~1818)의 <계서유고>에는 7월 기망(旣望) 예양강 유선(遊船)놀이가 나온다.

또 예양강 낚시터로 '추강조대(釣臺), 봉명조대, 부춘조대' 등이 있었다. 한편, 예양강 다리(橋)는 어떠했을까? 예양강을 두고 동교하선(冬橋夏船), "겨울엔 다리로, 여름엔 배로"라고 말할 형편은 아니었고, 달리 널리 알려진 나루터 흔적도 없다. 1520년대 신잠의 詩에는 안 보였지만, 그 후대 백광훈 詩엔 '예양동교(東橋)'가 나온다.

그 당시에 대나무가 무척 많았던 만큼 예양강 다리는 죽교(竹橋)였고, 부내방과 부동방 주민들 부역으로 보수되었다. ‘행원竹橋, 고읍竹橋’도 있었다. 1917년에 '예양죽교'는 '예양판교(板橋)'로 바꿔지고, 일제기 1927년에 철근콘크리트 다리가 들어섰다. 조선 중후기에는 '예양석교(石橋)'를 신축하자는 권선 논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축조를 못했는데, 부동방 '역천(驛川)石橋'는 있었다. (그 시절 '관산東橋'라 함은 곧 '예양東橋'이다.) 그런데 몇 石橋에는 '石다리'와 '섶다리' 유래가 겹쳐진다. (섶다리를 일부 지방에서는 ‘삽다리(삽교)’라 한다) 송강 정철(1536~1593)이 장흥 안양에 내려와 건넜다는 동계 石橋(독다리)에도 그렇게 겹쳐진다. 그런데 장동 북교리 石橋에는 '소꼬리' 유래까지 겹쳐 있다. 아마 처음엔 '섶다리' 수준이고, 나중에 '돌다리'가 놓였을 것. 고읍면(현재의 관산읍)의 학교(鶴橋)는 ‘鶴다리 모습’ 또는 ‘흙을 깐 흙(土)다리’, 단교(斷橋)는 ‘자주 끊기는 다리’, 회령방 '허공다리'는 홍교(紅橋) 형태, 니교(泥橋)는 ‘흙다리’, 세교(細橋)는 ‘잔다리’로 이해된다.

그러나 한참 후대에 등장한 안양 ‘주교(舟橋) 마을’ 지명유래는 실제로 건너는 다리와는 무관하다. 그 마을 일대에 비교적 넓게 펼쳐진 '논배미들<배미들이<배들이<배드리'를 놓고 한자어 '배舟, 다리橋'로 옮겼을것. 거기엔 무슨 다리도 없을뿐더러, 바다와 강물에 떠다니는 배(舟,船)가 그 마을까지 들어왔을 리도 없고, 포구도 물론 없다.

<부기> 1, <장흥읍지,2018>는 장흥 '예(汭)강'을 '눌(訥)강'으로 불렀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흘려 쓰면 언뜻 비슷해지는 모양의 ‘흘려 쓴 汭’와 ‘흘려 쓴 訥’를 혼독한 사례를 그만 다시 살펴보지 못하고서 소개했을 것.

2, 장흥동학혁명 때 ‘모정등~장흥성~석대들’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건너다닌 강물줄기는 탐진강이 아니라 ‘예양강’이었음은 물론이다. ‘탐진강’은 일제 식민지 시대가 개시되면서 작명 등장한 명칭일 뿐이며, 조선시대 <강진현지>에도 내내 ‘탐진강’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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