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9.(월) 08:30
서울동창 12명이 25인승 버스에 탑승하고 광주를 향해 서울 압구정동 현대백화점을 떠났다.

12:10~13:40
광주에 도착하여 광주동창 14명과 합류한 후 금남로 쌍학식당에서 오찬을 했다. 작년에 먹었던 그 식당이었는데 오랜만에 만나 왠지 서먹서먹했던 작년과는 달리 이번에는 친구도 음식도 짝짝 달라붙었다. 이번 식대도 마주현 동창이 혼자서 지불해 버렸다.

13:40~15:00
서울 광주동창 26명이 광주를 출발하여 1시간여 만에 장흥군청에 도착했다. 장흥동창 6명과 합류했다.

15:00~16:00
군청강당에서 정종순 군수가 군청 각 과장을 소개하고 환영인사를 했다. 서울회장 김동근 동창이 답사한 후 군 홍보영상을 시청했다. “맑은 물 푸른 숲” 이라는 군수의 새로운 고을 로고는 신선했다. 전임군수의 “어머니 품속같은 장흥” 과도 맥락이 닿는다. 맑은 물 푸른 숲이 없는 어머니 품속같은 고향은 존재할 수 없을 터이다. 따뜻한 남쪽 바닷가 장흥을 스포츠의 메카로 만들어 전국의 체육인들이 겨울철에 장흥에 와서 전지훈련을 하고 경기도 펼치도록 하며 기라성 같은 문학의 별들을 배출한 장흥을 나라의 문학 산실로 만들고 동학등 의를 위해 들고 일어섰던 장흥정신을 재조명 형상화하는 한편 군민 삶의 질을 개선하는 정책을 과감히 펴겠다는 결의에 찬 군수의 포부는 신뢰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16:00~16:40
장흥 항교를 방문했다.  전교님이 반갑게 일행을 맞아 환영인사를 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안내를 받아 경내를 돌아보았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된 장흥향교는 문림 의향 장흥의 얼과 정신이 살아 숨쉬는 심장이며 영혼의 샘터다. 수령 600년의 우람한 은행나무가 장흥 항교의 유장한 역사를 온몸으로 말해주고 있었다.

16:40~18:00
동학혁명기념관과 석대들 격전지를 돌아 천관산 기슭 정안사에 도착했다. 장흥 임씨 시조인 임호공과 그의 아들 정경공 임의 손자 문숙공 원숙, 문춘공 원후, 문헌공 원준 등 선조들의 위패를 봉안한 사우다. 위 임의공과 임원후 공은 다같이 재상을 지냈다. 안내자의 설명을 들으며 경내를 돌아보는데 깨끗하고 단아하게 관리 정돈된 경내가 정숙, 청결하다 못해 엄숙한 분위기까지 감돌았다. 맨 위 중앙에 자리한 영모제를 중심으로 밑으로 내려오며 좌우에 배치된 부속건물의 기하학적 공간배치는 조화와 안정감이 돋보였고 정갈하고 고즈넉한 뜨락의 기운이 겸손과 효심을 불러일으켰다. 나라 어디를 가도 선대를 모시는 사당으로서 정안사를 능가할 곳은 없지 싶었다. 담양 소쇄원에서도 느끼지 못한 정원미학에 심취했다. 
천관(天冠)의 정기(精氣)가 쏟아내려 한 곳에 모인 여기, 충효정신이 응집된 이곳의 기운을 받아, 멀지 않는 훗날 나라와 민족의 운명에 서광을 비춰줄 위대한 지도자가 혜성처럼 출현하리라는 영감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고려 제17대 인종의 왕비인 공예태후도 장흥임씨 후손으로 이곳 관산에서 태어났다. 왕이 서거 후에도 3명의 아들을 연이어 왕으로 내세운 후 나라권력을 한손에 거머쥐고 천하를 호령했던 희대의 여걸 저 유명한 공예태후가 이곳 벽촌 관산 땅에서 태어났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게만 느껴진다. 그의 공으로 한적한 시골 우리 고장이 일약 장흥으로 명명되고 부로 승격까지 되었으니 오늘 우리는 그 공을 기려 태후의 영전에 정중히 경배를 드려 마땅할 일이다.

18:00~20:00
장흥읍내 취락식당에서 만찬을 했다. 삼합, 생고기, 산낙지, 안양막걸리, 토속반찬 등 상차림이 푸짐했다. 군수, 군의회 의장, 경찰서장, 군의원, 신문사 사장, 번영회장, 조합장 등 각 기관장들이 인사차 와서 합석했다. 지역 기관장들과 출향인들 간에 나누는 화제는 단연 고향발전에 관한 것이었는데 시종 화기애애하고 진지했다. 이 날의 만남은 우연하게 이루어진 자리였으나 무릇 모든 조직 공동체는 구성원들 간에 평소 긴밀한 대화와 소통이 이루어져야 한다. 
소통이 되지 않는 조직은 동맥경화에 걸리고 만다. 소통을 잘 하려면 서로가 성찰적 말하기와 배려의 듣기를 통해 언어의 감수성이라는 근육을 키워야 한다. 활발한 소통으로 구성원들이 유대와 연대를 강화하는 일은 소속공동체는 물론 우리 사회 전체의 건강성과 활력을 제고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20:00~21:00
우드랜드 입구 찻집에서 식후 차담회를 가졌다. 한승원 동창이 강의를 했다. 강의 제목은 “이별연습을 하자” 였다. 사랑하는 아내와도 자식과도 나의 익숙한 일상용품 심지어는 내가 아침 저녁으로 쓰는 칫솔과도 이별을 연습하자는 것으로 죽음에 임할 때 평소 대비한 만큼 당황하지 않고 편하고 자연스런 모습으로 임종을 맞자는 취지다. 말은 옳은데 듣고 있는 늙은 친구들은 모두가 눈을 지그시 감은 체 괴롭고 착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꽃을 꺾어 집으로 돌아오다” 는 한승원 작가의 최신작 산문집이다.
작가가 고교 졸업 후 시골농어촌에서 힘들게 살면서 겪은 고뇌와 방황하던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다.
일상에서 건진 평범한 소재를 유려한 필치와 감성적 언어로 시적 영감까지 불어넣어 아름답게 버무려놓은 맛깔스런 글발에 이끌려 따라 읽다보면 작가의 묵직한 사유와 지식의 바다로 곧장 빠져든다.
동창들이여 이르노니 지금 당장 책방으로 달려가시라.

21:00~23:00
우드랜드 숙소에 도착, 방 배정을 받아 각기 제 방으로 들어가 담소를 나눈 후 잠자리에 들었다.

2018.10.30.(화) 06:00~08:00/ 아침 일찍 기상하여 가벼운 운동을 하고 산책길에 나섰다. 이른 새벽 밖을 나오니 피톤치드 향기가 우르르 코 속으로 몰려들었다.  어둠을 뚫고 억불산을 백여 걸음 기어오르니 어! 거기 눈앞에 아기를 업은 전설의 며느리 바위가 우람하고 기괴한 모습으로 뒤를 돌아본 채 떡하니 서 있었다. 

놀랍게도 불쑥 눈앞에 나타난 며느리 바위를 턱밑에서 바라보니 전설 속 가련한 과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척박하고 험준한 높은 산비탈에 당당히 서서 장대한 키 날카로운 몸체로 주변을 압도하고 있는 헌헌 여장부였다. 외지로부터 장흥땅에 들어서면 대번에 눈 안에 들어오는 상징적 “랜드마크” 며느리 바위, 어쩔 수가 없어 늙은 시아비를 홀로두고 아이를 등에 업은 채 집을 떠나야만 했던 한 많은 여인!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라는 금기를 깨고 시어른이 걸려 몸을 돌리는 순간 그 자리에 화석처럼 바위로 굳어버린 비극의 여인 며느리 바위! 그런 가여운 여인 이미지가 눈앞 대자연의 스펙타클과 충돌하며 전복(顚覆)되는 기이한 현상을 여기서 목도한다. 바위를 지나 가쁜 숨을 몰아쉬고 한참을 더 오르자 이내 산 정상에 도달했다.  그 시각 저 아래를 내려다보니 읍내 시가지와 주변 들판이 막 잠에서 깨어나 기지개를 켜고 있는 모습이 뿌옇게 눈에 들어왔다.  담배 한 대참을 쉰 다음 서둘러 산을 내려왔다.

08:00~09:00
우드랜드내 수랏간 밥집에서 키조개국 메뉴로 아침을 먹었다.

09:00~10:40
해남으로 출발하여 고산 윤선도 유적지 녹우당에 도착했다.
최성진 해남 부군수와 관광과장이 연락을 받고 미리 나와 있다가 환영인사를 한 후 준비한 해남특산품 선물을 전하고 돌아갔다. 해설사의 안내를 받으며 경내를 돌아보았다. 녹우당의 위치와 산세 주위환경은 풍수대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첫눈에 여기가 천하명당임을 쉽게 알 수 있겠다.

천시, 지리, 인화의 조화가 큰 인물을 배출할 수밖에 없도록 최적화된 곳이라고 보여 진다. 다산 정약용이 고산 윤선도가의 외손이라는 사실은 부끄럽게도 견문이 짧은 나같은 무지랭이에게는 금시초문이어서 적잖이 놀랐다. 조선사회 지식의 양대 산맥이라 할 두 거봉이 남남이 아니었음은 우연한 일이 아닌 듯싶다. 전시관에서 고산 윤선도와 후손 윤두서의 학문과 인물 그 발자취를 살펴보는 사이 돌연 정신이 맑아지고 영혼의 고향에 온 것 같은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모르는 사이 내가 지금 유교사상의 진앙지로 빠져 들고 있다는 신호이리라. 
유교가 무엇인가? 공자를 시조로 하는 사상이 유교라면 유교는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괄하는 최고의 이념으로 삼고 수신제가, 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일종의 윤리학, 정치학이며 수천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 등 동양사상을 지배하여 왔다.
춘추시대 말기에 태어난 공자사상의 진수는 논어(論語)에서 잘 나타난다. 
공자는 인을 가장 중시하였으며 인은 곧 효(孝)이며 제(悌)라 하여 인의 근본을 가족적 결합의 윤리에서 시작하여 육친 사이에 진심에서 우러나는 애정을 강조하는 한편 그것을 인간사회의 질서 있는 조화적 결합의 원리로 삼고 정치에도 전개시켰다. 

춘추시대 말기의 인간주의적 풍조의 영향을 받아 인간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성에 주목하고 거기서부터 현실사회의 혼란을 구제하려 하였다. 공자는 주(周)의 예악(禮樂)을 끌어들여 그 실행을 강조하면서 예는 전통적 관습적인 사회규범이며 그것은 곧 인의 사회성, 객관성을 보존하는 것이라 했다. 그 후 맹자가 나타나 인의 실체를 위한 의(義)의 덕을 내세워 인의(仁義)를 병창하였으며 또한 인간의 본성은 선이라 하여 내면적인 도덕론을 펴고 선한 본성에서 우러나오는 덕치로서의 왕도론(王道論)을 주장하였다. 맹자에 의하여 유교는 뚜렷하게 내면적으로 심화되고 또 정치적으로도 정비되었으며 한편 오륜(五倫)도 이 무렵에 시작되었다. 오늘 우리가 조선시대에 유교사상을 체화하고 실행했던 대표적 선비 사상가였던 고산의 본향에 와서 때묻은 마음을 씻고 그의 정신 세계속으로 빠져보는 것은 결코 헛된 짓이 아니리로다.

10:40~12:20
두륜산에 도착하여 케이블카를 탑승하고 1.6km 거리의 상봉 정상으로 날아올랐다. 케이블카 종착지점에서 일단 내려 이어지는 1km의 경사 길을 숨을 헐떡이며 더 걸어올라 마지막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서 바라본 남쪽 다도해 바다와 점점의 섬 그림은 장관이었다. 주위의 산들은 빨강, 노랑, 색깔의 단풍으로 곱게 물들었다. 원색의 파스텔톤 물감을 온 산에 뿌려놓은 듯 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명했고 기상도 좋아 늦가을 여행에 안성맞춤이었다.

12:20~13:30
대흥사로 이동하여 들머리에 있는 한국식당에서 해남 특산물 인 버섯탕으로 점심을 먹었다.
식사 후 곧 대흥사 관광길에 나섰다.  시간관계로 대웅전을 중심으로 가까운 몇 곳을 둘러보는 것으로 대략 관광을 마쳤다.  대흥사는 우리 7/6회 동창들과는 특별한 인연이 있다.
중학교 3학년 때 수학여행을 여기로 왔었다. 그때 난생처음 제일 먼 곳으로 더욱이 큰절로 가는 행차는 어린학생들을 걷잡을 수 없이 흥분시키고 들뜨게 했다. 그때 본 절의 웅장함 두륜산의 장엄함 수백 명의 밥을 한꺼번에 짓는 다는 목욕탕만한 솥단지를 볼 때의 경악은 지금도 머릿속에 남아 잊혀 지질 않는다.

대흥사는 우리들의 로망으로 지금까지 가슴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그 옛날 유배지인 제주도의 추사 김정희와 대흥사 초의선사간의 친교는 숱한 화재를 뿌렸다.  그윽한 다향(茶香)을 음미하며 도를 논했고 서화와 음악으로 풍류를 즐겼으며 시와 학문을 통하여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에 빠져들곤 했던 둘은 연치(年齒)를 초월하여 지란지교(芝蘭之交)의 벗이 되었으리.
서산대사가 여기서 참선을 닦고는 어떤 난리에도 이 절은 무사하리라고 했던 예언은 만고의 명언으로 지금까지도 유효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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