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육재 문덕구(1667~1718)는 ‘예양구곡 제6곡’으로 ‘부춘정’을 거명했다.
담헌 이하곤(1667~1724)은 1722년 늦가을에 예양강에 속하는 동강(桐江) 江亭, 富春亭을 방문했다.

<정묘지,1789>에는 ‘부산8경- 부춘어화(富春漁火)’, ‘文氏 金氏가 사는 부춘洞’이 나온다. 이윽고 文氏들은 부춘동에서 떠나가고, 소쇄담공(瀟灑潭空)으로 표현되었던 문씨 부춘정은 1838년경에 ‘청풍 金氏 富春亭’으로 거듭 태어났다.

당시 그 인수를 주도했던 ‘기(基)’자 형제들(김기헌, 김기형, 김기석, 김기성)은 미국의 알래스카 매입에 버금갈만한, 장흥 역사상 가장 탁월한 선택을 하였다.

정, 사, 원(亭, 祠, 院) 겸용 공간으로 개편하면서, 청풍인 자존심이 세워졌기에, “조상의 숨은 은덕(隱德)과 그윽한 광명(光明)이 수백년만에 현창되었다”고 자평했다. 당시 主人 김기성(桐江 金基成,1801~1869)의 원운(原韻)詩 첫머리, “年已四旬成此亭(년이사순성차정)”을 “정자 세운지 40년”으로 잘못 옮긴 경우도 있는데, “나이 40대(四旬)에 정자를 이루어냈다”는 말. 그 원운詩를 받은, 여러 명사문객들의 차운詩가 잇달았다. 부춘정은 ‘청풍 김씨 부춘정’이 되면서 남도 명소로 널리 알려졌다.

 장흥향토사에 등장하는 청풍 김씨 몇 인물을 살펴본다.
-문평공 김길통(1408~1473) 전라관찰사 순행 길에 ‘장흥 청화루’와 ‘장흥 동헌’을 읊은 詩를 남겼다. 부춘祠 배향인물

-수암 김세걸(金世傑,1474~1543) 군자감정 경력, 기묘사화(또는 신사무옥) 피화, 장흥 입향조, 부산 내안리 정착, 영광인 김괴(1450~1482)의 사위, 즉 김필(1426~1270)의 손녀 사위. 김세걸의 아들 김준의는 장흥의 광주(廣州)이씨 '이지번'의 사위가 된다.

 -인재 김양좌(隣哉 金良佐) 1491년경 장흥에 찾아온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조대기>에 등장한다. 1495년 진사.

-국경 김정화(國卿 金鼎華, 1599~1660) 1639년 진사, 평생 처사. 입향조 김세걸의 증손자인 '천곡장 김광철'의 아들, 선조 김길통의 <월천집>을 펴냈다.
장흥유배객 심동귀(1594~1660), 남인 윤선도(1587~1671)와 교류하였으며. 문집 <감호집>이 국역되어 있다.

-영촌 김성후(1683~1755) 노론 민정중,권상하 학맥의 문인. 유학(幼學) 출신으로 1727년 문과, 1742년 풍기군수, 1746 사간원 사간. 문집 <영촌집>
한편 어떤 외지인은 부춘정을 ‘군사적 방어시설, 또는 詩酒 풍악이 흥건한 풍류처’로 오해하나, 터무니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장흥 부춘정(富春亭) 공간은 ‘부춘八景, 부춘九曲(제2곡은 취수정), 칠리탄 조대(釣臺), 부춘 원림(園林)’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 가풍 백세청풍(百世淸風)과 그 편액 제일강산(第一江山)에 딱 들어맞는다.
덧붙이는 한 마디. 부춘정 차운詩 작자 이름 앞에 등장하는 ‘서원(西原)’은 ‘청주 김씨’ 출신임을 말한다.

장흥 부춘정은 외지문객들은 물론이고, 장흥의 다른 김씨들, ‘청주 김씨(동백정), 영광 김씨(사인정)’와도 그 자리를 함께 했던 교류 공간이었다. 부디 문중사우(祠宇)를 초월하여 장흥지방의 대표적 원림으로 더 세밀하게 가꾸어지길 당부 드린다.
‘청풍 김씨 부춘정’의 전사(前史)되는 ‘남평 문씨 부춘정’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로 돌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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