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장흥군 장동면 만년리 만수리 뒷산에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인 해동사

최근 일제의 징용배상의 대법원 판결 이후 이 문제는 한ㆍ일간의 외교적 갈등으로 점화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한,일간의 정치 사회 문화적 갈등은 어제 오늘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간 다방면에서 혹은 문제가 제기 되고 혹은 잠재되어 있던 일제 강점기의 수탈과 탄압의 씻어 내릴 수 없는 과거사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무거운 짐이었던가는 일일이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건전한 국가간의 상호 관계를 시대에 맞게 전향 하기 위해서는 한,일간의 문제는 그 시기가 언제이든지 간에 풀어 내야 할 양국의 과제이다. 다만 그 요건이 일본의 전향적인 태도에 있다는 것은 세계사적인 지적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금번의 징용 배상 판결에서 보여준 일본의 태도는 실로 실망스럽기 그지 없다. 도대체 일본은 언제까지 이런 오만하고 독선적인 행태를 유지할 것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민족의 정체성 확립이 너무나 절실하게 요구되고 있고 지난 역사의 과오들을 극복할 민족적인 자성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금번 장흥군에서는 장동면에 소재한 “해동사”를 복원하여 성역화 수준의 역사 테마파크를 건설하겠다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사업은 시대적으로도 주목 받을 사안이고 무엇보다 민족의 정체성을 확립 하는 역사적 과업을 장흥군이 선점 한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받을 것 같다.

장흥군이 역사 테마파크로 “해동사‘를 선택한 것은 독립운동사에서 가장 확실한 족적을 보여준 안중근의사의 위패가 모셔진 사당이기 때문이다.
한국인이 가장 존경하고 기억하는 독립운동가 1위를 기록할만큼 우리 민족의 자긍심을 보여준 안중근 의사는 1879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 났고 1909년 중국의 하얼빈 역에서 한반도 침략의 원흉인 이등박문을 저격 사살하여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안증근 의사의 의거는 조선인의 일제에 대항 분명한 항거를 보여준 사건으로 대륙을 진동케 하였다. 특히 중국인들에게 조선인의 기개와 저항의 정신을 보여준 쾌거이기도 했다.
안중근 의사(1879-1910)는 성장과 활동 무대가 북한과 러시아 중국 지역이었다. 민족의식의 자성이 형성되고 온 가족이 참여한 일제 저항의 치열한 활동과 더불어  교육, 군사  방면으로 영역을 넓혀 일제를 견제해야 한다는 소명감으로 무장한 안중근 의사의 행적은 연구할수록 경이롭게 다가온다.

천주교에 귀의하여 참으로 독실한 믿음의 본을 보여준것도 예사롭지가 않다.
일본인에게는 거의 영웅시 되는 이등박문을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거사로 조선의 독립 의지는 만천하에 입증되었지만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경 현장에서 체포 구금되어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사형 집행으로 순국 하기까지 일제는 초법적 재판과 집행으로 이 거사의 파문을 잠재우려는 의도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재판의 과정에서 안중근 의사는 당당 하였고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까지 한치의 망서림도 없이 순국을 택하는 기개가 알려질것을 두려워한 처사였다.
31세의 청년 안중근은 이렇게 순국 하였다.

우리 역사에서 안중근의사의 이름은 어떻게 기억되고 선양되고 있을까.
아쉽게도 안중근의사를 기리는 기념관 같은 공간이나 조형물도 변변치 않아서 실로 부끄러울 뿐이다. 작금의 징용 배상 판결과 앞으로 광주 고등법원에서 선고될 예정인 위안부배상 판결같은 민족적 정체성이 대두 될 때마다 안중근의사의 기개와 의거가 세삼 스럽게 조명 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웁게도 전국에서 유일하게 안중근의사의 위패를 봉안하여 매년 제사를 지내는 곳이 우리 장흥군에 소재한 해동사라는 것이다. 남쪽에는 연고가 없는 안중근의사의 추모 공간이 장흥에 조성된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해동사 건립 배경은 이러하다.
1955년 당시 장흥읍에 거주하던 지역 유림의 유력 인사였던 안 홍천(죽산 안씨)선생이 지도자가 되면서 평소에 존경하던 대손인 안중근 의사가 국내에 후손이 없어 제사조차도 변변히 모시지 못한다는 사정을 인지하고 중론을 모아 사당을 건립하기로 하였다.
안씨 문중과 유림들이 성금을 모아 1955년 10월27일 사당이 완공되었다.

사당을 건립 하는 과정중에 안홍천씨는 당시 대통령이던 이승만을 면담 하여 안중근의사의 사당 건립 취지를 보고 드렸던바 이승만 대통령이 해동명월(海東明月)이라는 휘호를 기념으로 전달 하였고 이에 사당을 해동사(海東祠)로 명명 하였다.

해동사가 준공된 1957년 10월27일  영정 봉안식에는 안중근의사의 딸 현생씨와 동생 준생씨가 참석하여 칠거리 차부(시외버스 정류장)에서 동교 다리를 건너 영정을 모시고 행진 하였다.(사진 참고) 그 봉안식에는 전국에서 1만여명의 추모객들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 그 이후 매년 음력 삼월 열이튿날이면  제사를 모시면서 안중근의사의 숭고한 의거를 기념 추모하여 왔다.
전남도에서는 1984년 도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 하였지만 지금은 해동사의 안팎 사정이 쓸쓸하기만 하다.
추모객들의 발길은 줄어 들고 추모 공간의 전시물도 빈약하여 래방객도 드믈고 군민의 관심도 높은 편이 아니다.

이제 장흥군에서 해동사를 성역화 하여 역사 교육의 현장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체험 공간으로 조성하겠다는 사업을 가시화 하였다니 실로 반가운 일이다.
2016년 촛불 혁명의 의지는 무엇이었던가?

실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지만 그 중 한 가지는 역사와 민주 정신의 회복이었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치욕과  자유당과 유신 독재 군부 독재의 참담한 역사를 청산 하지도 회복하지도 못하였던 과거사의 쌓이고 쌓였던 의식들이 촛불 혁명으로 분출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촛불 혁명의 완성을 위해서는 국민 모두가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시대적 과제를 안은  시점에서 장흥군이 독립의거의 표상처럼 본을 보여준 안중근의사를 테마로 하는 사업을 기획 추진한 것은 참으로 시의 적절하다고 보여 진다.
이 사업의 보다 능률적인 추진을 위해서는 민간 차원의 “추진위원회”가 구성 되어야 보다 폭 넓은 방안들이 도출 될 것 같고 그 추진위에는 관내외의 역사학자. 문학인, 언론인, 안씨 문중의 인사, 천주교 인사, 전시 연출 전문가 등이 포함 되었으면 하는 제안을 드린다.(昊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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