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고사를 연구한 학자들에 의하면 한민족의 뿌리는 인류문명의 시원사와 그 태동을 함께하고 있으므로 고조선보다 훨씬 이전부터가 우리민족의 역사라는 것이다.

필자는 상고사에 대한 고증여부를 떠나 9월엔 당나라의 도예사로 입국한 우리성씨(위)의 뿌리를 찾아 중국 하남성 정주와 개봉 등을 다녀온바 있으며, 지난달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사업회가 내년 상해임시정부 100주년을 기리기 위해 기획·추진한 임시정부의 발자취를 찾아가는 역사탐방을 했다.

독립운동의 사적지라면 중국대륙과 시베리아 벌판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하지만 이번 역사탐방은 상해와 항주를 중심으로 한 그 주변의 탐방이었으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역사를 새롭게 조명해 볼 수 있었기에 소회의 일단과 우리의 자세를 정리해 본다.

상해임시정부의 사무실 등 역사적인 현장은 그동안 보도 등을 통해 접한 것과 별반 다르지 않았으나 임정요인들의 구체적인 활동상과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뒷바라지해준 고마운 분들에 대해선 안내요원의 설명과 현장체험을 통해 감격과 감동은 물론 다시 한 번 옷깃을 여미게 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의 과정에서 우리민족의 독립역량을 묶어 효율적으로 지도할 수 있는 조직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서 4월 11일 상해를 비롯하여 국내외적으로 크게 3곳에서 설립하였다가 그해 9월 15일 상해임시정부로 통합하여 새로운 민주공화제로 헌법을 제정하고 정부조직을 갖췄다.

임시정부는 상해에서 13년 동안 활동했으나 이봉창·윤봉길의사의 거사로 일경에 쫒기여 가흥, 항주, 진강, 남경, 장사, 광주, 유주, 기강, 중경 등 10여 곳으로 옮겨 다닐 수밖에 없는 갖은 역경 속에도 단 하루도 멈추지 않고 조국의 독립을 위해 고군분투하면서도 광복군까지 창설하여 1941년 12월 10일엔 대일선전포고문을 발표했다.

그 외에도 활발한 외교력을 발휘하여 1944년에는 프랑스, 폴란드. 소련으로부터 임시정부승인을 받았으며, 1945년 8월, 광복직전에는 연합군과 합동으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했으나 15일 일본의 항복으로 실행에 옮기지 못한 아쉬움을 남겼다.
이처럼 임시정부는 물경27년 동안 풍전노숙하며 목숨 바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멸사봉공했음에도 미군정하에서 자주독립의 법통을 인정받지 못함은 물론 개별입국과 더불어 갖은 홀대를 받았으니 그 섭섭함과 잘못된 역사는 천추의 한이 되었다.
 이로 말미암아 일제부역자들을 청산하지 못함은 물론 민족정기마저 바로세우지 못한 단초가 되었으며, 이러한 통한의 역사는 지난 보수정권이 탄핵될 때까지 외면되고 왜곡되었으니 누구를 원망하랴!

우리 모두 그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함을 자책하면서 이제는 민중이 주체가 된 위대한 오월정신과 6.10항쟁을 계승한 촛불시민혁명에 따라 새로운 정부가 수립되고, 한반도에 모처럼 평화의 바람이 불어오고 있으므로 남과 북은 편향됨 없이 역사를 바르게 정리하고 기억하면서 다시는 잘못된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역사탐방에서 백범의 피난처 가흥의 매만가는 사방으로 통할 수 있는 호수에 바로 접해있어서 언제든지 뒷문 비상탈출구로 배를 타고 피할 수 있는 곳이었으나 매순간을 얼마나 초조하고 위태로운 나날 속에 독립운동을 지도하셨을까싶어 숙연해진 마음으로 호수를 바라보며 상념에 잠겨보았지만 호수는 말이 없었다.

더욱이 윤봉길의사는 농촌계몽운동을 하던 중 광주학생운동을 접하고 끓는 피를 감출 수 없다며 상해로 망명해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여 약관25세의 젊은 나이에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 바침으로써 중국장개석총통은 ‘중국군 100만이 못한 일을 조선청년 1명이 해냈다’고 찬사하면서 임시정부의 재정과 더불어 물심양면으로 협력하고 지원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런 분들이 아니었으면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우리가 있겠는가싶어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옷깃을 여미며 추념했다.
커다란 강물도 크고 작은 한 방울의 물들이 모여 이뤄지는 것처럼 애국지사들에 대한 제각각역할의 발자취와 중국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다 찾을 수야 없겠지만, 역사만은 바르게 정리해서 반드시 기억하도록 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선생은 역사를 잃은 민족은 미래가 없다고 했다. 오늘날의 대한민국과 우리는 우연히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애국지사들의 희생과 더불어 임시정부의 자주독립정신에서 비롯되었으니 생생한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면서 다시는 나라를 잃은 비극이 되풀이되지 않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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