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향토사(史)에서 초계(草溪) 변(卞)씨 위상은 어떠했을까? 옛 예양강의 인문학 요람이 된, 장흥 동정(東亭, 봉명정)을 세운 ‘변포(~1488)’ 장흥부사가 있다.
장흥 입향조 ‘변온(1474~ )’은 전 동복현감이었다. 그 시절 변씨 몇 분을 살펴본다.

-여경 변대손‥1521년경 유배객 ‘영천 신잠’을 상대하며 위로해주었다. 입향조 ‘변온’의 손자. 1504년 진사. ‘신잠’의 <관산록>에 동촌(東村)노인으로 나온다.-병마절도사 변국간(1527~1591)‥7곳 병사 수사를 역임했던 국가 간성으로, 전라병마사 재직 중 타계하였다. 여수 좌수영에 '변국간 선정비'가 있다.

-변이보(卞爾寶,1651~ )‥변국간의 현손으로 1681년 생원진사시에 구중하였다.
얼마 전 타계하신, 사회적 약자보호로 신망 높았던 ‘변정수(1930~2017)’ 헌법재판관도 안양 출신의 초계 변씨이다.
卞씨 집성촌은 안양 비동,동촌이었고, 사당은 안양 목단에 있는 덕후재(德厚齋)로 ‘민덕귀후(民德歸厚)’에서 온 말이다. 당시 변씨 충훈들의 적극적 참전 이유는 집안 가풍(家風)에 따른 것이겠지만, 충무공 모친과 조모가 초계 변씨라는 사정도 나름 작용하였을 것. 변씨 형제들은 전쟁 초기엔 주로 ‘권율’ 쪽에 있었지만. 삼도통제사 재임용 후엔 ‘이순신’을 스스로 찾아 장흥 회령포에 모두 집결하였고, 명량해전에 참전하였는데, 특히 ‘변국형, 변국간, 변국경’ 3형제 집안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변국형의 세 아들로, '변홍원,변홍제'는 명량 참전 후에 정유년 지포해전에서 순사하였다. 셋째 변홍주(1561~1597)는 아들 변덕황과 함께 남해 운대 등에서 순사하였다. 변홍주는 ‘명량해전 순사자 마하수(1538~1597)’의 사위이니, 그 해에 장인과 사위가 순사하였다.

 -변국간의 네 아들로, '변홍건,변홍달,변홍적,변홍선'도 명량 참전 후에 정유년 당포해전에서 모두 순사하였다. 변홍건의 사위가 ‘남원성 순사자 문기방(1548~1597)’이니, 장인 사위가 같은 해에 운명했다. 변홍달(1559~1597)은 무과 갑과2위 급제에 ‘흑면비장’으로 유명했고, 정유년 당포해전에 참전했던 아들 변덕일은 훗날 명나라 지원군으로 파견되어 요동 심하(1619)에서 순사했다.

-변국경의 아들인 ‘변홍량(1569~1597)’도 명량참전 후에 지포해전에서 순사했다.
또한 변씨 집안의 ‘변연수(1538~1597), 변립’ 부자 역시 당포해전에서 순사했다.(그들은 마산 쪽에 모셔졌기에 13충훈 유허비에는 그 이름이 없다)
정리하면, 정유년 순사자 형제숙질 11명에서 ‘변연수 부자’를 빼고, ‘변국간,변덕일,변덕장,변공의’을 합한 13명인데, 선무원종공신은 4명이었다.
한편 ‘권율’의 이치대첩(1592)을 기린 ‘원수권공 이치대첩비’와 ‘충장사(금곡사)’ 사당에 관련한 공훈자로 ‘변홍건,변홍주,변홍량,변덕황,변국간,변홍달’ 6인이 모셔져있다, (이미 1591년에 타계했기에 ‘변국간’ 부분은 착오일 것).
또한 ‘안양 동계 8장사’에 ‘변홍건,변홍달,변홍적’ 3형제도 포함된다.
현재 안양 수양3거리에 못 미친, 대로변 우측의 안양서교 쪽 밭에 위치한 13충훈유허비는 접근도 불편하고 너무 쓸쓸해 보인다.
동촌(東村) 고향을 멀리 바라볼 수 있도록 세웠던 같으나, 차제에 초계 변씨 형제숙질들이 李충무공을 스스로 찾아갔던 회령포성 쪽으로 이설하면 어떨련지?
나라 살리는 데에 온 목숨을 바쳤으되, 종내(終乃)에는 남자 부족으로 그 집안이 크게 기울어지고 말았을, 장흥 땅 초계 변씨 여러 충훈들 이야기는 늘 감동스럽다.
그들은 “孝에 이르는 길은 곧 忠을 다하는 것”이라 여겼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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