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 기록들에 비추어 스스로 판단해보자.
삼도수군사 통제사로 복임(復任) 복용(復用)된 이순신 장군이 ‘단기필마(單騎匹馬)’로 ‘배설’을 찾아갔다는 곳, 즉 당시 배설(裵楔)이 단지 8척 전선(戰船)을 거느리고 머물고 있었다는 ‘회령포’가 과연 어디인지를? 일부 보성사람들과 노모 소장에게 물어보자.
“왜 <난중일기>와 기록에는 ‘보성 군학리’는 안 나오며, 보성 군학의 ‘김명립’ 장군은 안 나오며, 장흥 사람들 향선(鄕船) 10척이 ‘보성 군학리’에 모였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며, 이순신 장군이 ‘보성 군학리’에서 말(馬) 대신에 鄕船을 얻어 타고 ‘회령포’로 갔다는 이야기는 안 나오는지?”를 물어보자.

“마하수가 이순신 장군을 찾아 왕배(往拜), 왕예(往詣)한 회령포가 과연 어디인지”를 물어보자. 그리고 한 번 더 물어보자. “이순신 장군이 보성 군학리에서 鄕船을 타고 장흥 회령포에 당도했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난중일기>에도 없는 사연인데, 보성사람들은 무슨 근거로 그런 주장을 하는지? 보성사람들은 “單騎馳到(단기치도) 회령포”에 대해 “말(單騎)을 타고 회령포에 치달아 당도했다”가 아니라 왜 “배(鄕船)를 타고 뱃길로 회령포에 당도했다”로 우겨대는 것인지, 과연 무슨 곡절이 있는지?
아래 글에서 ‘순신(舜臣), 李통제, 李공’은 ‘李순신’을, ‘설(楔)’은 ‘배설(裵楔)’을 가리킨다.
‘마하수’ 관련 글에서는 당시 해중(海中)에 있던 ‘마하수’가 ‘회령포’로 찾아가 ‘이순신’을 왕배(왕예)한 이야기가 확인된다. ‘마하수’는 결코 향선 10척을 끌고 ‘보성 군학리’로 ‘이순신’을 찾아간 일이 없다.
단기치도(單騎馳到) 회령포. 그 상징적인 말(言) 한마디, 말(馬) 한마리가 오늘의 논란이 있는 장흥 보성 땅에 그 마침표를 찍어준다 할 것이다.
장군이시여, 單騎馳到, 그 말을 타고 다시 한 번 ‘장흥 회령포’로 치달으시길.

<백사집 (이항복), 故통제사李公遺事>
...朝廷復用公爲통제사, 公聞 命, 單騎馳到 회령포 道遇경상우수사裵楔, 時 楔所帶戰船只有八隻...
<백호집(윤휴), 제장傳, 원균 편>...及순신復將, 聞 楔全軍在회령포, 순신單騎馳見楔, 咨 楔以進取計, 楔盛言賊鋒不可當, 勸순신下岸觀變, 순신不聽...

<은봉전서(안방준), 記事>...夫순신之再爲統制也, 聞 경상우수사裵楔, 以所帶戰船 來泊회령포, 單騎馳到, 咨 楔以進取之計...

<이충무공전서, 백사집, 충민사記>...公聞 命, 單騎馳到 회령포, 道遇경상우수사裵楔, 時 楔所帶戰船只八隻...

<이충무공전서, 馬氏家狀> - 마하수, 官선공주부(繕工主簿)
丁酉, 備船一隻 避亂海中, 聞 李통제復任, 喜曰 吾輩何憂,
遂往拜(왕배) 于회령포, 李公曰 冒刃來訪辛苦, 君之一鄕避亂船有幾,
公曰 可十隻... (李公은 ‘이순신’을, 나중의 公은 ‘마하수’이다)

<연경재집(성해운), 督府 忠義傳,> - 마하수, 장흥인
丁酉, 避兵海中, 聞 이순신復爲통제사, 喜曰 吾屬無憂矣往詣(왕예)순신 於회령포, 순신勞曰 君鄕里避兵船有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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