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암(楓菴) 문위세(文緯世)와 그 다섯 아들은 부산면에서 출생했으며 문위세는 43세부터 부산면 내동마을에「풍암서실」을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다가 52세 때 유치면 늑용리로 이거하여 그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는데 장흥댐 건설로 전국 각지로 뿔뿔히 헤어져 정리합니다.

■문위세 생애
※출처: 풍암 문위세선생 연구-경북대학교 김시황(金時晃) 교수. 1534년 9월 11일 부산면 부춘리에서 출생했다.
9세~10세 외숙 귤정(橘亭) 윤구(尹衢)에게 소학(小學)을 배우고 11세 미암(眉巖) 유희춘(柳希春)선생이 경전(經傳)을 가르치다가 13세 퇴계(退溪) 이황(李滉)에게 추천하여 14세 때 도산서원에 입학했다.
15세 퇴계 이황선생이 단양군수 부임하여 고향 부산면으로 돌아왔다.
22세(1557년) 부친 상(喪)을 당하여 주자가례(朱子家禮) 따라 3년상(喪)을 행하였다.
25세(1560년)부터 도산서원에서 학문을 퇴계선생에게 배웠으며 27세 때 퇴계선생이 제갈공명(諸葛孔明)의 팔진도(八鎭圖:군사조련훈련법)을 언급하고 그 팔진도 해설서를 베겨쓰게 했다.
31세 모친병환소식을 듣고 집에 돌아왔으며 32세(1565년)때 외숙 윤복(尹復)이 안동부사로 부임할 때 도산서원에 수행했으며 외종제(윤복외숙 아들) 윤강중? 윤흠중? 윤단중 형제와 함께 다시 퇴계선생에게 주자학 가르침을 받았다.
34세 (1567) 모친의 명령에 따라 향시(鄕試)에 나아가 장원급제하고 사마시(司馬試)에 유몽정, 이길과 함께 급제했다.
37세(1570년)때 퇴계 선생이 서거하자 귀향했다.
39세(1572년) 모친상(喪)을 주자가례에 따랐고 3년상(喪)을 마쳤다.
43세(1576년) 내안리 풍산(楓山)에 서실을 짓고 제자 수십명에게 강론했으며, 44세(1577년)때 미암 유희춘 스승이 호남순찰사가 되어 호남5현(賢)으로 조정에 천거하였다.
52세(1585년) 유치면 늑용리에 집을 짓고 성리학 연구하면서 시 3편 부(賻:시조보다 더 긴 노랫말) 28편을 남겼다.
54세(1587년) 백운암(白雲菴)을 짓고 아들 조카들에게 활쏘기, 말타기, 6예(藝, 禮, 樂, 射, 御, 書, 數)를 가르쳤다.
56세(1589년) 기축옥사에 연루된 인물 이종동생 이발?이길 가족들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59세(1592년)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여 문위천?문위지 형님과 함께 부춘정에서 의병 일으킬 것을 논의하고 집안 가족100명동원 및 군량을 모아 보성의 자형 박광전 등과 함께 전라좌의병군을 조직했다.

■풍암 문위세 다섯 아들 유치면 입촌
 장남 문원개(文元凱) 호는 용잠(龍岑)이며 1562년12월 6일 부산면 부춘리에서 출생했다. 1586년 유치면 늑용리로 이거했고 그 후손들을 동막파(종파)라 부르는데 유치면 늑용리와 덕산리에서 600여년 동안 세거해 오다가 장흥댐 건설로 전국 각지로 이거했다.
차남 문영개(文英凱) 호는 해은(海隱) 또는 죽헌(竹軒)이며 1565년 8월 1일 부산면 내동리에서 출생했다. 작은아버지(仲父)에게 양자(出系)하였고 그 후손들은 보성군에 세거하고 있다.
삼남 문형개(文亨凱) 호는 인봉(仁峯)이며 1568년 8월 23일 부산면 내동리에서 출생했다. 유치면 늑용리에서 유치면 오복리로 이거했으며 그 후손들은 유치면 오복리에서 유치면 대리? 단산리로 이거하고 세거하면서 당록파라 했으나 장흥댐 건설로 경향각지로 이거하였다.
넷째 아들 문홍개(文弘凱) 호는 갈옹(葛翁)이며 1571년 1월 29일 부산면 내동마을에서 출생했다. 1700년경 유치면 늑용리에서 문상용(文尙龍)이 유치면 송정리로 입주(入住)한 후 그 후손들이 세거하다가 장흥댐 건설로 이주했다. 1700년경 유치면 늑용리에서  조양리와 신풍리로 이거한 후 지금까지 그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으며 어응파 라 한다.
다섯째 아들 문여개(文汝凱) 호는 자수당(自修堂)은 1573년 7월 14일 부산면 내동리에서 출생했다. 1700년 경 유치면 늑용리에서 이거하여후손들은 지금도 유치면 신풍리에 세거하고 있으며 안로파라 한다.
여섯째 아들 문괄개(文括凱) 호는 양암(陽庵)은 1587년 유치면 늑용리에서 출생했다. 삼곡파 라 부르며 장흥댐 건설로 후손들이 세거했던 늑용마을은 수몰되었으나 그 후손 일부는 유치면 용문리에 세거한다.

■「강성서원」
 1644년 옛 풍암서당에 제단(祭壇)을 설단(設壇) 배향하고 청소년을 교육했으며 1702년 사우(祠宇)를 건립했다. 1785년 문익점선생과 문위세선생의 공덕을 알려 조정에서 사당 편액(扁額)을 내려 강성서원(江城書院)이라 하고 전남도 문화재 자료 제70호로 지정하였다.
장흥댐건설로 현재 위치(유치면 조양리)로 이건했으며 유물과 유적으로 임진왜란 당시 의병활동 내용을 기록한「풍암공 문위세 신도비」와 임금을 사모하였던「사군대(思君臺) 유허비」등이 있다.

■ 맺는말
※출처: 문위세 일가(一家) 의병운동, 순천대학교 조원래 교수)
 퇴계 이황 선생의 호남제자 가운데 수제자로 성리학은 물론 병법(兵法)과 무예(武藝)까지도 배우고 익혔던 문무를 겸비한 학자이며 큰 선비였다.
풍암 문위세는 1585년 유치면 늑용리로 이거한 후 집을 짓고 성리학 연구하면서 한시 3편과 부(賻:시조보다 더 긴 노랫말) 28편을 남겼다.
54세(1587년) 유치면 늑용리에 백운암(白雲菴)을 짓고 아들 조카들에게 활쏘기, 말타기, 6예(藝:禮,樂,射,御,書,數)를 가르쳤다.
 평상시에는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의 인간본성에 의해 오륜(五倫)을 완벽하게 실천하였고 임진왜란 때 유치면과 부산면 일가 가족100명을 동원하고 의병을 일으켜 획기적인 전술(戰術)로서 큰 공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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