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의종군을 마치며 삼도수군통제사 교지를 받은 후에 이순신 장군이 장흥 회진 회령포鎭(城)에 당도하기 직전에 들리신 '군영구미'가 어디인지?, 그 수군 재건로 여정을 둘러싼 다툼이 크다.
일부 보성 사람들은 '보성 회천 군학'을 '군영구미'로 본다. 그곳에 쌀 창고가 있었고, 향선(鄕船) 10척이 모여들었고 (혹자는 배설의 12척도 왔다고 한다) 충무공이 그 ‘보성 군학’에서 鄕船을 타고 ‘회진 회령포’로 뱃길 직행했다고 주장한다. (당시 회령포鎭 위치에 대해서도 보성의 혹자는 보성 군학리로 지목하고, 다른 혹자는 모호하게 얼버무리는데, 당시 회령포진(鎭)이 장흥 회진 회령포城(營)에 있었음은 객관적 사실임에도 저쪽에서는 당시 회령포성과 옛 회령폐현을 부러 혼동하는 것이다.)

이에 그 ‘군영구미’를 검토해본다. 보성 사람들이 내세우는 '회천 군학'에 대비되는 '장흥 안양 해창(海倉)' 내력을 다시 살펴본다.
무엇보다 장흥 안양 海倉은 조선시대 조운창(漕運倉)이었다. 漕倉을 설치한 최초 시점은 불상이지만, 조선 초 이래로 세미(稅米)를 걷어 서울 경강(京江)으로 보냈음은 분명하다.
안양 海倉에서 출발하여 회진 회령포- 영광 법성창- 안면도- 강화도를 지나 약15일만에 한강 京倉에 도착한다. (보성 조양창과 고흥 해창도 그런 漕倉에 해당된다.)
후대의 <장흥읍지>에 의하면, 海倉 조창에는  좌수영에 속한 대선 병선 사후선 각 1척과 부선소(附船所)도 있었으며, 전선저치미(儲置米)가 3200석 남짓 있었다. 그런 海倉 포구와 부선소를 표시한 조선시대 지도도 남아있다.

같은 <정묘지>에 따르면, 1914년 이전에 장흥 땅에 속했던, 옛 회령 군학(현 회천 군학)은 평범한 마을에 불과했고, 그 군학을 군사요충지 또는 포구로 표시한 지도 또는 기록은 전혀 없다. 직접 가보면 알겠지만, 움푹 들어간 구미 형태 포구도 아니고, 그 수심도 낮을 뿐더러, 어떤 쌀창고 유적이나 포구 내력도 없다.(장흥지역에서 모은 稅米를 신작로도 없던 그 시절에 안양 海倉을 한참 지나서 그 회천 군학으로 옮겨 적치했다 함은 가히 보성적 개그 아닐까?) 더구나 <정묘지, 회령방>에 '군학, 귀정(龜亭), 휘리'가 별개 마을이었음에도 요즘 보성 사람들은 같은 마을로 간주하고 온갖 주장을 조립해내고 있다. 돌이켜 안양 海倉은 ‘조운창’ 시설은 물론이고 ‘소금 가마터, 사기점(店)’이 있었고, 일제시기에 주재소와 우편국이 가장 먼저 들어설 정도로 나름 번화한 곳이었다.
대형 창고시설과 깊은 수심(水深) 덕분에 대형 선박과 여객선이 드나들었는데, 일제시기를 거쳐 60년대까지 수차 방조제 및 간척사업이 계속 되면서 그 포구시설과 유적이 온통 망실되고 말았다.

지금은 창고유지(遺地) ‘곳집터’만 있다. 이순신 장군이 율포 ‘백사정'을 지나서  '군영구미'에 당도했을 때 "창고에서 쌀을 훔쳐가는 장흥 관리(색리)를 목격했다."함은 그 ’군영구미‘에 쌀 창고시설이 있고, 그 창고를 장흥 관리가 관장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당시 말을 타고 이동하였던 이순신 장군은 “다음날 그 '군영구미'를 출발하여 늦은 아침에 회진 회령포鎭에 도착하셨다”고 했다.

보성사람이 주장하는 논지, “장군이 鄕船을 얻어 타고 뱃길로 군학에서 회령포진으로 이동했다”는 사정은 창작 스토리에 불과하고 정작 <난중일기>에도 없는 이야기다. 그렇다면 그 '군영구미'는 장흥 안양 海倉일까? 지금의 보성 회천 군학이어야 할까? 일부 보성사람들은 ‘안양 海倉 조운창’이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사실을 애초 몰랐거나, 아니면 일부러 한 눈을 감고서 버티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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