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 쪽 관광홍보 군책사업과 그를 뒷받침하는 전남도청의 지원정책으로 인하여 재작년부터 그 혼선이 여전하다. 일부 보성 사람들은 “임진난 당시에 지금의 보성 땅 군학리에 회령포가 있었다.”고 고집하는 언동을 계속 하고 있다.

심지어 “보성 회령포 만호 노홍, 보성 군학리 회령포 만호 민정붕”이라 표기하는 자도 있고, <보성 마을유래지>도 “지금의 ‘보성 군학리’로 이충무공이 재기하던 12척 또는 향선 10척이 모여들었다”는 식으로 기재하는 등으로 가관이다.

이른바 보성 군학리 출신의 해상의병 지도자격으로 갑자기 등장시킨 ‘김명립’ 장군이라는 분도 금시초문인데, 그 생몰연도 확인이라도 해보았을까? (<장흥읍지, 호남절의록> 등 어떤 기록에도 안 나왔다) 이른바 보성 군학리를 두고 ‘조선수군 재건로 종점’이라는 미명을 붙여 마치 학예회 수준 같은 환경미화작업이 한창이라고 하는데, 아니 재건(再建), 그 삼도수군통제사 취임식을 정작 장흥 회진 회령포에서 했기에 회령포성이 곧 종점이자 재기의 출발지인데, 그 ‘재건로 종점’이라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들은 “이순신 장군이 보성 군학리에서 향선을 타고 뱃길로 회진 회령포로 왔다”는 황당한 주장도 거침없이 하는데, 물론 <난중일기>에 없는 내용으로 문화해설사 수준의 창작 스토리일 뿐이다. 요컨대 그들은 도대체 ‘회령진성(營)’과 ‘회령폐현(廢縣)’을 구별할지를 모른다.

살펴본다, 예전이야 <조선왕조실록> <신증동국여지승람>도 그 확인이 어려운데서 이런저런 혼선이 빚어졌지만 요즘은 그 사정이 다르다. 인터넷 자료와 국역 자료검색 등이 바로 가능하다. 이른바 회령포(鎭,城) 문제만 하여도 그렇다.

1592년경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1530년경에 이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남쪽 72리, 수군만호1인, 회령포영’과 ‘동쪽, 회령폐현’이 구별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왕조실록>에도 1425년경 이진(移陣)사정이 물론 있지만 ‘1490년4월경 성종21년 기사’로 “장흥 남쪽에 1990척 회령포성이 축성되었다”고 혼선 여지없이 명쾌하게 기재되어 있다. <장흥읍지>만 하여도 그렇다, 그 후대의 일부 <장흥읍지>에 혼선이 있을지언정, 가장 앞선 <장흥읍지 정묘지>의 ‘대흥방 관방 - 회령진성’, ‘회령방 고적 - 회령진’이 서로 구별되어 있다. 기왕에 살펴보건대, 1914년경 행정구역 개편으로 인하여 원래 장흥 관할이던 ‘웅치방, 회령방, 천포방’ 3면(3방)이 보성 지역으로 이속되고 만 사정을 기화로, 보성 사람들은 그 지역 옛 역사와 사람들을 온통 보성 쪽으로 귀속시키려 한다.

심지어 장흥 지역의 ‘반곡 정경달’ 선생을 보성의 영광 정씨로, 장흥 지역의 ‘초계 변씨 충훈들’을 보성의 변씨로 둔갑 분식시키는 것. 그러다보니 보성으로 이속된 ‘군학리 구미영성’과 장흥에 여전히 있는 ‘안양 해창 군영구미’를 분별하려 하지 않는다.
언제부턴가 그들은 습관적으로 한 쪽 눈만 뜨는 외눈팔이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장흥 쪽에도 있다.
그 문제의 발단시점부터 장흥군은 물론이고 군의원 도의원들도 도대체 장흥 쪽 역사를 침탈하는 보성 쪽 역사미화작업의 심각성에 관심이 없었다.

또 <대덕읍지>경우도 ‘회령포성 1554년경 이진설’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고, 장흥의 어떤 집안 역사를 연구한다는 일부 논자 글도 그러하다, 부지부식 간에 범한 실수일 것이다. 요즘은 교수 논문이라 한들, 특히 옛 자료출처가 문제되는 경우이면 그 기본적 검증을 빠뜨리지 않아야 한다.
또한 보성 쪽 사람들 주장이라면 한 번 더 살펴보아야 할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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