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회령포문화축제가 9월 21일~23일까지 회진면 회령진성과 회진항에서 열리고 있어 장흥 출신 김세호(金世浩)감독관이 직접 도끼를 이용해전선(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개조했던 곳은 회진면 덕산리 땅재끝 이라고 정리하였습니다.

■ 회진 덕도에서 개조한 거북선
 명량해전을 앞두고 회령진성 주변 덕도 해안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병창에서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꾸민 구조는 다음과 같은 것으로 추정한다.
바닥에는 평평한 저판을 깔고, 옆에는 삼판을 이어 붙이고, 삼판이 안으로 기우는 것을 막기 위해 가룡목을 이용해 고정을 하는 한국 전통 선박의 기본 구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북선의 장점은 돌격전에 유리하나, 전체적인 전황의 판단에는 불리하므로 함대의 주된 기함과 전투함은 판옥선이였다.
그런데 복직된 이순신 3도수군 통제사는 명량해전을 앞두고 회령(포)진성에서 1597년 8월 18일에 부서진 판옥선을 거북선으로 꾸미라고 명령하여 만들어진 거북선으로 명량해전에서 일본병선 133척과 싸워 31척을 격파시켜 물속에 잠겨버렸다.

■ 정유재란 때 거북선 건조(建造) 기록
 ▼ 이분(李芬)의『행록(行錄)』
 이순신장군의 맏형 의신의 아들로 임진왜란에 종군한 이분(李芬)이 쓴 『행록(行錄)』에는 ‘거북선을 창작(創作)하니 크기는 판옥선 만한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위에 십자모양의 좁은 길을 내었다.’라고 기록되어있다. 또한, 원균(元均)의 패전으로 1597년에 본영에 와서 행정적인 업무에 종사하였으며, 1597년 정유재란 이전에도 작은 아버지 이순신을 방문하고 있음을 『난중일기(亂中日記)』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가 기록한 『행록(行錄)』에 전선을 창작하니 크기는 큰 판옥선만 하는데 위에는 판자를 덮고 판자위에 십자모양의 좁은 길을 내어 사람이 다닐 수 있게 하고, 나머지부분은 모두 칼과 송곳을 꽂아 사방으로 발붙일 곳이 없도록 했으며, 앞에는 용머리를 만들었고, 입은 총혈(銃穴)이 되게 하고, 뒤에는 거북꼬리처럼 만들었는데 그 밑에도 총혈이 있었으며, 좌우에 각각 총혈 여섯 개가 있었다.
그 모양이 거북의 형상과 같아 이름을 ‘귀선(龜船)’이라 하였다.
훗날 싸울 때에는 송곳과 칼을 위에 꽂고 선봉이 되어 나아가는데 적이 배에 올라와 덤비려 들다가 칼과 송곳 끝에 찔렸고, 적선이 포위하려하면 좌우 앞뒤에서 일제히 총을 쏘아 적선이 아무리 바다를 덮어 구름같이 모여들어도 거북선은 적진 속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크고 작은 싸움에서 항상 승리한 것 이었다.

■【회령(포)진성】에서 전선(戰船) 몇 척을 고쳤을까?
명량해전에 조선측 전선을 12척이었다고 대부분 기록하고 있으나
이분(李芬)의『행록(行錄)』과 조원래 임진왜란 의병사를 살펴보면 13척임을 발견할 수 있다.
▼ 이분(李芬)의『행록(行錄)』
 -이순신장군의 조카 정랑(正郞) 이분(李芬)은 1592년부터 1598년까지 두드러진 충무공의 사적을 자세히 기록한 자료 『행록(行錄)』을 규장각본 <이충무공 전서>에 부록으로 아래와 같이 수록되어 있다.
1597년 8월 18일 회령포에 도착하니 전선은 10척이다.
전라우수사 김억추를 불러서 병선을 거두어 모으게 하고 또 여러 장수들에게 분부하여 “전선을 거북선으로 고쳐서 군세를 돋우도록 하라.”고 하였음.
十八日  至會寧浦  戰船只十?,  公召全羅右水使金億秋  使收拾兵船 分付諸將  粧作龜艦  以助軍勢
대략 말하기를 “우리들이 임금의 명령을 같이 받들었으니, 의리상 같이 죽는 것이 마땅하지만 사태가 여기까지 이르렀는데, 한번 죽음으로써 나라에 보답하는 것이 무엇이 그리 아까울쏘냐? 오직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굳게 약속했음.
約曰  吾等共受王命  義堂同死  而事己至此  何惜一死以保國家乎!  惟死而後己  諸將無不感動
▼ 조원래 임진왜란 의병사 (p.291)
이순신은 전라우수사 김억추에게 명령하여 전선부터 수습하여 수리? 정비하게 하였다. 당시 남아있는 병선이란 칠천량 해전에서 패주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온 8척과 녹도선 1척 뿐이었다.
時裵楔所帶戰船  只有八?  又得鹿島戰船一?…(중략)…分召全羅右水使金億秋使之召集  管下諸將五員  收拾兵船  分付諸將 粧作戰艦  以助軍勢
※출처: 이충무공전서 권10. 부록 「충민사기(忠愍祠記)」1
▼『선조실록』권94
 자료를 살펴보면 당시 전선은 12척이 아닌 13척임을 발견할 수 있다.
臣與全羅右道水軍節度使金億秋等  收拾戰船十三隻 哨探船三十二隻
※출처:『선조실록』권94. 30년 11월 정유조(丁酉條)
▼『호남절의록』 권3
김세호 조선감이 급하게 8척의 거북선을 건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以造船監 躬操斧斤造八大艦  鳴梁戰斬賊殺數十隻
※출처:『호남절의록』권3.「충무공이순신동순제공사실(憧殉諸公事實)」의 김세호(金世浩)조(條)

■ 하고 싶은 말
 1597년 8월 18일부터 8월 20일까지 칠천량 해전에서 패주한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끌고 온 8척 전선(판옥선)을 장흥출신 김세호(金世浩) 조선감(造船監)은 직접도끼를 이용하여 전함(거북선)으로 개조했던 곳은 그 당시 장흥도호부 내덕도(內德島) 덕산(德山)해안(현재 전남 장흥군 회진면 덕산리 땅재 끝)에 위치한 조선병창(造船兵蒼)이다.
그 당시 회진면과 인근읍면 주민들은 짧은 기간에 파손된 전함을 거북선으로 고쳐서 꾸미는데 갖은 고난을 겪었을 텐데 관련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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