馬江煙雨(마강연우)/화산 정규한

백제의 강산에 아무것도 남지 않고
석양 빛 삿갓에 늙은이가 하나로다
강호에 뱃노래 가락 이슬비에 들리네.
百濟江山空復空   夕陽惟有一蓑翁
백제강산공부공   석양유유일사옹
浮家不管滄桑事   數曲漁歌細雨中
부가불관창상사   수곡어가세우중

패장(敗將)은 말이 없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런지 백제의 역사는 외롭기 그지없다. 위례→웅진→사비로 천도 했었지만 기우는 나라의 운명을 붙잡을 수 없었던지 의자왕 삼천궁녀를 연상하는 것이 백제사의 모두다. 그래서 고란사를 찾는 시인묵객의 마음을 무겁하게 하고, 멀리 흐르는 백마강을 보면서 지난 날의 역사만을 떠올린다. 백제의 강산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않고, 뱃노래 슬픈 가락이 이슬비 속에 아스라이 들리네 라고 읊었던 시 한 수를 번안해 본다.

강호에 떠도는 몸이 세상사와는 무관한데(馬江煙雨)로 번역해본 칠언절구다. 작가는 화산(華山) 정규한(鄭奎漢:1751∼1824)으로 조선 후기의 학자이다. 다른 호는 운수산인(雲水山人)이다.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인 송환기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후학양성에 힘썼으며, 자연을 벗 삼아 시문을 즐겨 당대의 문장가로 이름을 떨쳤다. 시문집인 <화산집>이 전한다. 위 한시 원문을 의역하면 [백제의 강산에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않고 / 빗기는 석양에 다만 삿갓 쓴 늙은이 하나 있네 // 강호에 떠도는 몸이 인간 세상사와는 전혀 무관한데 / 뱃노래 슬픈 가락이 이슬비 속에 아스라이 들리네]라는 시심이다.

위 시제는 [백마강의 안개비]로 번역된다. 백마강은 역사가 어린 곳이다. 망해가는 역사의 흔적을 부여안도 백제의 흔적이 마지막 남아있는 곳이 백마강과 낙화암이기 때문이다. 백마강 가에 있는 수북정을 오르면 상촌 신흠의 <수북정팔경(水北亭八景)>를 보게 된다. 이를 두고 차운한 시다.《상촌집(象村集) 권19》에 실린 원시(原詩)는 다음과 같다. [오백년 그 세월이 한바탕 꿈이런가(五百年間一夢空) / 이끼 낀 돌 지금은 고기 낚는 노인 것이라네(苔磯今屬釣魚翁) / 제멋대로 오고 가는 외로운 돛단배 한 척이(孤帆隨意往來穩) / 푸른 물결 가랑비 속을 뚫고서 들어가네(穿入碧波煙雨中)]라는 시다.

시인은 이런 원운에 차운했던 만큼 백제의 흥망성쇠를 안고 유구한 세월을 흘러온 백마강 가에서 느끼는 허망한 심정은 비슷하지만 이후의 시상 전개에서 차이점이 발견된다.
화자는 빗기는 삿갓 쓴 늙은이 하나는 연상하더니만, 강호에 떠도는 몸이 세상사와는 전혀 무관한데 뱃노래 슬픈 가락이 이슬비 속에 들리네 라고 했다. 역사의 흔적과는 무관하게 낚시하는 한가한 모습을 여유롭다는 시상을 떠올리고 있다.
위 감상적 평설에서 보였던 시상은, ‘백제 강산 하나 없고 삿갓 늙은이 하나 있네, 세상사와 무관하게 슬픈 가락 아스라이’라는 시인의 상상력과 밝은 혜안을 통해서 요약문을 유추한다.

【한자와 어구】
百濟: 백제. 江山: 강산. 空復空: 비고 또 비다. 아무 것도 없다. 夕陽: 석양. 惟有: 오직 있다. 一蓑翁: 삿갓을 쓴 늙은이. // 浮家: 집을 떠돌다. 不管: 무관하다. 滄桑: 세상이 크게 변하는 것을 이름. 滄桑事: 세상사를 뜻함. 數曲: 두어 곡조. 또는 몇 곡조. 漁歌: 어부의 노래. 細雨中: 이슬비 속에./<문학평론가ㆍ시조시인/사)한교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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