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남산공원에 세운 가사문학비에도 '임계탄(壬癸歎)' 작자를 '미상(未詳)'으로 처리했다한다. 과연 합당한가?

그런데 ‘가사(歌辭) 임계탄’ 말고 ‘율시(律詩)임계탄’이 또 있다. 임계탄(壬癸歎)은 임자(1732),계축(1733) 연간의 장흥 지방에 있었던 흉년(殺年) 재해의 참상을 탄식한 내용이다.
먼저 '7언律詩 임계탄' 작자, 방호(放湖) 김희조(金喜祖,1680~1752) 선생을 살펴본다.

부산방 내안 출신, 영광김씨로 1713년 생원시 입격에, 1728년 '이인좌 난' 당시에 성균관을 지켰던 수관(守館) 절의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대과를 포기하고 귀향했던 것 같다. 1728년경 영조의 구언(求言)에 대응한 구폐시(九弊詩)와 만언소(萬言疏)도 있는데, 비록 '詩 임계탄'에 “凶年見殺固無嫌(흉년견살고무혐, 흉년에 죽임 당해도 아무 혐의가 없도다)”이란 표현은 있어도 전체적 내용은 퍽 절제되어 있다. 예컨대 歌辭 임계탄에 나오는 "나라가 나라 아니고, 백성이 백성 아니다."는 식의 과격한 언사는 전혀 없다. 당대 장흥의 생활상을 이모저모 알려주고 있는, 선생 문집 <방호집>에 ‘律詩 임계탄’이 실려 있다. 우리 장흥의 역사전통을 풍요롭게 해줄 문화적 자산인 <방호집>의 조속한 국역을 바란다.

다음 '歌辭 임계탄'과 간암 위세옥(魏世玉,1689~1766) 선생을 살펴본다.
'위덕화,위정철,위동전' 3대를 잇는, 장흥위씨 무반가 출신으로 서울 주자동(반송방)에서 태어나 성장했다. 어린 시절 명성에도 서자(庶子)출신 때문인지 소과 입격이 여의치 못했고, 1721년(경종1년)에 장흥으로 낙남하였다. 서울과 장흥을 두루 체험한 입장이고, 낙남 이후에도 여러 지우들이 있는 서울을 왕래했다. 1734년에 서울에서 '위세봉' 이름으로 ‘구폐6조, 7실자(實字)’ 상소를 올렸는데, 그 상소문 상당부분이 歌辭 임계탄과 중복되고 있다. 1751년경 족손 위백규(1727~1798)를 충청도 덕산에 있는, 병계 윤봉구(1683~1767)에게 제자로 소개했고, 위백규는 1759년에 생원시에 입격했다. 그런 위백규가 쓴 <간암 행장>에 따르면, 그는 박학다식에 비분강개의 성품으로, 당시 부패 지방관(장흥부사)과 갈등이 심했으니, 歌辭 임계탄의 일부 내용과 노골적 비판 태도에 여러 모로 상통한다.

한 가지 더 정리해본다. 그 제목이 같은, ‘7언律詩 임계탄’과 ‘시국歌辭 임계탄’이 병존하는 셈이니, 혹 두 작품 작자가 동일인 아닌가? 가사 임계탄도 그 연배가 앞선 방호 선생의 작품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겠다. 필자 의견이다. 누가 먼저 '임계탄' 용어를 썼는지는 별론 하되, 歌辭 임계탄 작자로는 ‘간암 위세옥’ 선생을 거듭 추정한다.

지난 2005년경에 임형택 교수의 歌辭 임계탄 발견보도와 작자未詳설을 접하고서 '간암 위세옥'설을 장흥신문에 바로 투고했음에도 <장흥문화 26호,2006>로 겨우 게재할 수 있었다. ‘간암 위세옥’으로 판단한 이유 하나는 歌辭 임계탄에 “감진어사 죽마래영(竹馬來迎)”이라 거명된, ‘관양 이광덕(1690~1748)’ 때문이다. 그는 경화사족(京華士族, 이경석의 현손에 박세채의 외손)으로, 1710년 진사, 1722년 대과, 1727년 전라감사, 1733년 호남감진어사 경력에 여흥민씨 집안과도 가까웠는데, 이광덕이 민유중의 아들 민진원을 구하려다가 탄핵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민진원의 아들 ‘민형수(1690~1741)’가 해배 귀경길에 천관산을 등정하는 모습이 존재 위백규의 <예예설>에 등장하고 있는데, 그 민형수의 부친 민진원을 간암의 부친 위동전이 상관으로 모신 인연이 있었다.

나중에는 그들간 사회적 신분 격차가 벌어졌을지언정 어린 시절 같은 연배의 ‘이광덕, 민형수’와 ‘위세옥’ 사이에 죽마지우(竹馬知友) 가능성이 높다. ‘간암처사 위세옥’의 일생에 대해서는 다음 지면에 보충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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