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에서 연산군 외할머니(고령신씨)와 그의 외삼촌이 장흥에서 13년 동안 유배했다는 근거와 남효온 선생이 장흥을 찾아와  윤구(연산군의 외삼촌)를 위로하면서 남겼던 자료를 정리하였다.
■ 할머님이 일러주신 말씀
필자가 어렸을 때 할머님는 “화롯불에 밤을 구워주시면서 옛날에 임금님의 외할머님이 우리 마을근처(국도23호선 지천터널 주변)에서 유배생활하면서 아침마다 쌀을 씻은 물이 계곡물 따라 흘러내려왔고, 마을 사람들은 쌀이 귀해서 흘러 내려온 쌀 씻은 하얀 물을 바가지로 떠서 먹었단다.”라고 말씀해주었다.
그러던 중 2010년 1월에 정남진 행복 숲(장흥군청 옆 주차장 부근)」을 조성하면서 봉명정(鳳鳴亭)이라는 건물을 신축해놓고 조선시대 봉명정을 재건(再建)했다는 설명에 대해 그 의미가 이해되지 않아 조선시대에 있었던 그 당시 봉명정(鳳鳴亭)위치를 확인하던 중에 연산군 외삼촌(윤구 尹?)과 외할머니(申氏)가 장흥 땅으로 귀양왔던 사실을 조선왕조실록에서 찾아냈다.

■ 폐비윤씨와 연산군
조선시대 성종이 통치하던 시대는 평화로운 시대였고, 성군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성종은 12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30여명에 가까운 자식을 얻었기에 세력간의 다툼이 컸던 시기이도 했다.
이러한 부인들의 다툼과 모함의 한가운데 폐비윤씨의 이야기가 있다.
성종은 궁녀로 들어온 윤기무의 딸을 아끼게 되어, 첫째부인이 죽자 그녀를 왕비로 책봉한다.
윤씨는 왕비가 되기 전에 왕자 융을 낳았는데 후일 연산군이다.

■ 조선왕조 실록 내용
 ▼ 연산군 외삼촌과 외할머니 유배
1482년(성종13년) 8월 17일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윤씨 어미신씨(申氏)와 윤구(尹?)는 …(중략)… 장흥(長興)에 유배하도록 하소서.”라고 하니 명하였다. 이어서 전교하기를 “신씨(申氏)는 윤씨(연산군 어머니)의 염장(殮葬)이 끝나기를 기다려서 내려 보내도록 하라.”라고 하였다.
義禁府啓: “配尹氏母申氏及尹?於長興, 尹遇於巨濟, 尹逅於珍島。”
命改逅濟州。 仍傳曰: “申氏待尹氏斂葬後下送
<출처:조선왕조실록 성종144권, 1482년(성종13) 8월 17일 2번째 기사>
▼ 연산군 외삼촌과 외할머니 해배
1495년(연산군1) 9월 20일 …(전략)… 원상과 승지들이 아뢰기를…(중략)… 다만, 윤구(尹?)등의 범죄는 그것이 난신의 연루와 같은 것이 아니니, 놓아 줌이 어떠하리까? 라고 하니. 임금이 전교하여 ‘그리하라.’하면서 의금부(義禁府)에 전지(傳旨)하기를, 전라도 장흥(長興)에 안치한 윤구(尹?)와 그 어미 신씨(申氏)는 놓아 돌려보내라. 라고 하였다.
庚子/弘文館校理成希顔還自三水郡復命, 仍啓: “臣觀三水之地, 人物鮮少, 元居軍士僅一百餘人。 雖以南官軍士一旅入戍, 一旅之數只百餘人, 而其中有任事於監司、兵使營, 而不赴防者多, 故實留防者至少。 三水舊無邊警, 而今年繼有賊變, 臣意以謂, 入防軍士加數而戍。 且郡進上脯, 限蘇復命減何如?” 傳曰: “卽減之。 防戍事, 令院相議之。” 院相及承旨等啓曰: “命議亂臣安置人疎放若因國家慶事可也, 今無緣議放未可。 但尹?等罪犯, 非亂臣緣坐之比, 放之何如?” 傳曰: “可。” 傳旨于義禁府曰: “全羅道長興安置尹?, 其母申氏, 濟州安置尹逅, 巨濟安置尹遇放還。”
<출처: 연산군 9권, 1495년(연산군1) 9월 20일 1번째 기사>
▼조정에서 매년 쌀 30석 하사
연산군 어머니의 생모 신씨와 그 동생 윤구는 왕비윤씨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전라도 장흥 땅에 유배되었는데 연산군은 13년동안 유배되어 있던 외삼촌 윤구와 외할머니 신씨에게 매년 쌀 30석과 황두(콩) 20석을 하사했다. (출처: SBS 대하드라마 「왕과 나」 대본 일부)

■귀양왔던 연산군 외삼촌을 위해 지은 한시
1487년경 남효온은 유랑하던 중에 장흥도호부 객관(客館)에서 머무르면서 연산군 외삼촌을 동정<東亭:예양강(탐진강)동쪽언덕>에서 만나 옛정을 서로 나누면서 한시를 남겼다.
예양강동정, 유별경회(汭陽江東亭, 留別慶會)
- 예양강 동정에서 경회(윤구:尹?)에게 이별시를 드림-
장흥 땅 수려해도 내 고향 아니거니
/관산수려비오토(冠山雖麗非吾土)
이별한지 다섯 해에 홍안은 늙었구려 
/별래오년홍안창(別來五年紅顔蒼) 
만난지 며칠만에 또 헤어지자
/상봉수일우상별(相逢數日又相別) 
맑은 눈물 샘 솟아 이별 잔에 떨어지오
/청루랑랑락이상(淸淚浪浪落離觴)
예양강물 푸르기 유리구슬 같은데   
/예양강수류리벽(汭陽江水琉璃碧)
꽃 지자 봄빛도 마지못해 돌아가네     
/화락춘광귀반강(花落春光歸半强)
성군께서 한 명의 인재도 버리지 않으시니   
/성조일재무기척(聖朝一才無棄擲)
그대 같은 글재주를 그 누가 잊으리오
/여군사조숙능망(如君詞藻孰能忘)
뇌양의 봄 죽순은 남인이 사모함이니   
/뇌양춘죽남인사(雷陽春竹南人思)
구공도 마땅히 중서당에 들었었소   
/구공응입중서당(寇公應入中書堂) 
부탁하오니 애써서 밥 거르지 마시오 
/기어노력가손반(奇語努力加손飯)   
부르는 왕명이 당도할 날 이제는 바쁠게요
/학서부롱금당망(鶴書赴롱今當忙) 
봄날에 송별자리 동정을 펼쳐주니
/춘천조석동정상(春天祖席東亭上)
옛 친구 정회로 이 슬픔 견딘다오
/죽마정회태감상(竹馬情懷太堪傷)  

  ■ 연산군 외삼촌과 노닐면서 남긴 조대기
 1491년(음력)3월 초순경 문인 학자였던 남효온은 장흥도호부 객사 별관에서 머무르면서 예양강(탐진강) 독곡(獨谷)에서 윤구(尹?), 이침(李琛), 김세언(金世彦), 김양자(金良佐), 이세회(李世?),박의손(朴義孫), 최석이(崔石伊)등과 함께 자리하면서 조대(釣臺 낚시이야기) 기문(記文)을 남겼는데 장흥의 산수(山水)와 관련된 기록이다. 또한 정명세 조대유허비가 있다고 전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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