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객관성을 잃고 극히 주관적인 관념의 노예가 되어 자신뿐만 아니라 공동의 생할에서  질서를 해치고 비리의 온상을 만드는 행태를 우리 주위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인간이 서로를 이해하기 어렵게 만드는 안개와 같은 불투명한 시각(視覺)이 바로 개인생활과 공적 삶을 구분 못하는 무지(無知)의 소행(小行)이다.
개인윤리와 사회윤리 사이에 갈등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개인의 도덕적 및 사회적 행동과 사회 집단의 행동 사이에는 명확한 구별이 있어야 한다. 신앙적 차원에서 제시된 윤리적 표준과, 현실 사회에서 경험되는 비리와 위법 사이에서 겪어야 하는 갈등과 대립을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문제가 질적, 양적 양측 최대공배수 도덕적 잣대를 어디에 둘 것인가 하는 것이다.
가족, 사회, 국가를 이루고 사는 인간은 그가 속한 집단 안에서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 한다.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던 사람들도 집단이 되면 이기적으로 변모한다. 개인의 이해관계는 가장 이상적인 계획과 가장 보편적인 목적들에까지 파고든다. 집단이 크면 클수록 공동의 지성과 목적에 도달하기는 어려워진다.
집단 간의 윤리는 개인 간의 윤리와 전혀 다르다. 국제사회에서 국가 간의 윤리는 자국의 이익을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자국의 이익을 다른 국가나 민족보다 더 중요하게 취급한다. 자기 민족과의 관계가 성립되는 다른 국가와의 이해관계가 자신의 민족적 태도 내지 정치적 관점과 상충할 때, 그 민족의 국가는 자연히 이기적이 된다.
국가 공동체의 존재를 확립하기 위해서는 국가간의 분쟁은 필연적이다. 또 강제적 수단을 장악하고 있는 집단은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이를 강자의 위력을 사용하는 것이 불가피하다. 경제적 지배계급에 의한 국가의 이윤추구, 노동자 계급의 착취 및 원료와 시장의 획득에 전력을 기울이는 국가의 모습은 이를 입증해 준다.
사회의 요구와 개인 내면의 요구는 본질적으로 차이가 있다. 사회를 중심에 놓고 보면 가장 도덕적인 행위는 정의이고, 개인 입장에서 보면 가장 도덕적인 행위는 이기주의이다. 도덕의 문제가 개인적 차원에서 집단들의 관계로 옮겨갈수록 이기적 충동은 사회적 충동을 누르고 득세하게 된다. 따라서 아무리 강한 내면적 억제도 이기적 충동을 완전히 억제할 수는 없다.
자신에게는 관대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엄격해지는 잘못을 시정하려면, 무엇보다 다른 사람의 이기주의에 비해 자신의 이기주의를 더욱 가혹하게 억제하는 훈련이 필요하다. 이런 훈련을 통해 선의지(先意志)의 감정과 상호 이해하는 태도가 생겨나지 않는다면, 어떤 공동체도 조화되거나 결집될 수 없다. 그러나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이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개인의 이해나 욕구가 구속 받지 않고서는 성취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 정흥신문이 산고의 아픔을 딛고 새로운 집행부를 출범시켰다. 지방신문의 어려운 경영실태를 헤쳐나가기 위한 고뇌의 꼬리 짜르기 결단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신문의 질적 수준을 경영의 최고 목표로 운영되어 왔으나 지역 신문, 특히 군 단위의 주간 신문의 현실은 지켜나갈 수 없는 요구였다. 물론 신문의 존재는 독자와의 관계에서 정립되고 실현된다. 그동안의 원론적 신문강령이나 윤리를 실험해 오면서 지킬 수 없는 것은 형식과 주변의 인식에 구애 받지 않고 과감히 개혁의 메스를 단행하지 않을 수 없는 장흥신문의 어려운 선택에 대한 독자의 양해와 이해가 신문의 힘겨운 도전에 큰 힘과 응원이 됨을 말씀드리는 바이다. 그러나 경영의 무게를 줄이는 것이 신문이 지켜야 할 의무마저 외면하는 것은 아니다. 어쩌면  부족함을 발견했다는 것이 다행한 일이며, 자유시장 자본주의의 메카니즘에서 잔인하고 냉혹한 결점도 필요한 것이었음을 깨닫는 것도 중요했다.
그러나 신문 발전의 동기가 되는 불의에 무릎 꿇지 않는 것은 그 어떤 딜레마에도 이겨 나갈 수 있는 에너지라는 것 또한 우리의 외침이다.

우리의 결단은 결코 생계를 꾸리기 위한 고전악투의 힘겨움은 아니다. 숨겨진 더 나은 창조의 실험을 만나기 위한 새로운 접근방식이라고 믿는다. 우연이나 유토피아적 유혹에 현혹되지 않는 것이 지금은 우리의 당면한 최고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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