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장날에 토요시장에 나오는 대장간 하나 남아 있다던가? 옛날 장흥에선‘농기구 솥 가마’ 등을 어디에서 만들었을까? 보림사 비로나자불(858)은 장보고 암살(851) 이후 청해진 해체 때에 회수한 무기로 만들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장흥 지방 대장간 흔적은 <정묘지, 조선지지>에 ‘기록된 지명’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한자말 ‘수철(水鐵)’은 우리말 ‘무쇠’에서 유래한 것이다.

<정묘지,1747>에 나오는 지명 사례들이다.
고읍방 수철점(水鐵店), 점역(店役), 현 관산읍 수동리로 추정된다.
<조선지지>에 ‘백목(白木)’산지로도 나온다. /유치방 수철리(水鐵里), 점역(店役), 현 위치 불명이다.(유치 오복리에서 신월로 가는 모퉁이에 쇠찌꺼기 터가 있었다) /용계방 수철리(水鐵里), 현 부산면 심천 北1리로 기록되어 있다.

<조선지지,1911년경>에 나오는 지명사례들이다.
장흥읍 西10리 석동리 ‘무수동’,(席洞 불곡 화로店)/ 장서면 ‘수철곡(水鐵谷,무쇠부리골)’, 현 장평면 제산리 후등 /장동면 내양리 ‘화로봉 불당리’(불곡,불무동). 우리말 ‘불당’ 지명은 ‘佛堂 불당’과 ‘풀무동 불당(가마터)’으로 구별되니 그 분별에 유념해야 한다.

위와 같은 <정묘지, 조선지지> 기록에 나오지 아니한, 전래 지명을 살펴본다.
그 지명사례로 “쇠터(새터,신기,신흥), 풀무골(불뭇골, 불당골), 압곡(鴨谷), 부정(鳧亭)” 등을 지목해 볼 수 있다. ‘새터’는 ‘새로 만들어진 마을’ 경우도 있으나, ‘쇠터’의 변형인 경우도 있다. 무릇 제철터는 원료 사철(沙鐵, 沙金, 알), 풍부한 물(用水), 땔감나무(주로 소나무) 등 입지조건에 관련하여 그 지명흔적을 남긴다. ‘철(鐵)쇠’는 ‘사(沙), 새, 소(牛)’로 변형되기도 하고, ‘쇠터’는 ‘새터(新基),사촌(沙村),우산(牛山)’이 되기도 한다. 또한 ‘쇠(銑선)끼미’ 역시 대장간이 될 수 있다. (또한 옛 역사에 나오는 ‘소도’를 ‘쇠터’로, ‘소도 우두머리’를 ‘거서한’으로 보고서 ‘쇠철을 지배한 수장’으로 이해하는 소수 異說도 있다) 한편 ‘쇠’의 원료를 ‘알’로 보고 ‘알’이 많은 ‘알江, 아리水’에서 유래한 ‘아리, 오리’를 ‘오리 압(鴨), 오리 부(鳧)’로 받은 ‘압곡(鴨谷), 부정(鳧亭)’ 마을 경우도 대장간 또는 가마터와 관련된다는 주장도 있다.
짐작해보면, 엣 장흥지방 경우도 1면(방)에 한 곳 정도의 ‘수철리 제철터’가 있었을 것 같다.
앞서 소개한 관산면, 유치면, 용계방의 수철점(水鐵店) 말고도 여타 제철터가 가능한 경우를 다시 생각해본다.

용산면 제철터로는 ‘금곡(金谷) 쇠(銑선)끼미’ 마을이 있다. 금곡(金谷)은 전국적으로 널리 분포된 지명으로 ‘사이 곡, 동쪽 마을’이라는 뜻도 있다. 금곡은 엣 ‘장흥 부평방’에도 있었다. 용산 금곡(金谷)을 둘러싼 ‘선조 임금의 금곡지명 하사설, 중국 부자 석숭의 금곡지명 차용설’은 전혀 근거 없는 낭설이다.

안양면 제철터로는 ‘사촌(沙村)’을 지목해볼 수 있다. 대개는 ‘모래가 많아 사촌’이라고 받아들이지만, 다른 지역 사례처럼 ‘쇠터’의 변형으로서 ‘사촌’일 수도 있겠다. 모래가 많은 마을이면서도 동시에 ‘쇠’를 다루었을 수 있다. 옛 안양 사촌에는 ‘사기그릇 가마터, 소금 가마터’도 있었다.

장평면 제철터로는 ‘봉림리 불무동’이 있다. ‘불무동’은 풀무간에서 유래하고 ‘야동 (冶洞), 불뭇골’로 불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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