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헤어짐과 떠남에서 서로의 감정 교차가 상이한 것이 보편적 현상이다. 남녀가 서로의 사랑이 미움이 되어 그렇게도 콘크리트 사랑을 다짐했던 약속을 휴지처럼 내팽개치는 모습들을 너무나 자주 접하고 있다. 사랑은 서로가 부족함을 채워주는 과정에서 익어가고 다져간다는 철인(哲人)들의 말이 새삼 메마른 현 사태에 교훈으로 받아드려지고 있다.

살아 있기 위해서는 서로의 끊임없는 연결이 필요하다. 그 연결들이 모두 흡족하거나 자신을 옹호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오히려 그 연결들을 거부하고 싶을 때가 삶을 살아가면서 더 많을때가 있을지 모른다.
우리들은 살아가면서 무수히 많은 부딪침에 직면한다. 그 부딪침의 충돌과 오해속에서 자신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삶의 방향을 발견한다. 바로 이것이 삶의 새로운 지평이며 발전의 동기가 되는 것이다. 정말 많은 지혜와 기질이 요구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리가 웃고 즐기는 이면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슬픔속에 좌절과 고통에 휘몰리고 있다. 고통을 이겨나갈 수 있는 능력의 원천은 자신에 대한 신념과 현실에 직면하는 올바름을 지켜나가는 학습이라고 생각한다. 학습은 스스로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에 혹은 시스템에 의해 자신이 또 다른 형상으로 만들어지는 수동적 모습이다. 그 학습을 통해서 양식과 질서가 터득되는 것이다. 인간사회의 바람직한 결론은 각 개인에게 주어지는 구속과 제제에 얼마만큼 이해되고 숙련되는 농도에 따라 결정되는 것이다. 구속력이 배제된 자유는 질서를 오염시킨다.

활력있는 사람은 줄기차게 앞만 보고 살아간다는 말은 있지만, 이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앞만 보고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오히려 좌우 뒤에서 자신의 시각을 분산시키고 뒤에서 허리춤을 붙잡는 것이 우리 삶의 모습이다. 이론과 실제의 두꺼운 벽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무너지지 않는 철옹벽이다. 싫어도 믿어야 하는 인간의 과제이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을 심장이 뛰고 있다는 것으로 결론짓는 것은 무리이다. 생물학적으로는 맞지 않지만, 행동이 필요하기 때문에 심장이 뛰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 우리는 무언가 쉼 없이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만 심장의 능력이 발휘되는 것이다. 심장의 존재 조건은 삶이지만, 그 보다 선행조건은 행동이다.

잠에서 일어나 다시 잠을 맞이하는 하루의 시간들은 기질, 분노, 권태, 욕구로 얼룩진 변칙들에 시달린 시간의 연속이었다.
얼마전에 군청에서 퇴임하는 공직자 환송식을 취재한 일이 있다. 30년 이상 자리를 지킨 그 들에게 기쁨만 있었겠고 만족한 일만 있었겠는가. 
아마도 수도 셀 수 없이 자리를 박차고 사표를 쓰고 싶은 생각이 얼마나 많았겠고 자신을 옥죄어 오는 불합리에 얼마나 많은 분노를 삼켰겠는가
얼굴에 깊이 파인 주름이 말해주는 그들의 자나온 여정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음을 쉽게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이런 행사가 없었다고 한다. 어느날 출근하면 덩그러니 퇴임자가 떠난 빈 자리가 그의 퇴임을 묵시적으로 일러 줄 뿐이었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오랜 공직에서 퇴임하는 분들에 대한 아쉬움을 서로가 마음에 담고 생각의 연결을 끊지 말자는 인연의 약속을 만들겠다는 계획을 했다고 한다.  참 잘한 행사이다. 살이있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을 실천하는 이 행사에 큰 박수를 보낸다.
이제 그들은 떠났지만 그들과 함께 웃고 혹은 다투고 했던 일들이 하나의 추억으로 담겨져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가슴깊이 각인되는 아름다움의 세포가 온몸을 퍼져나가는 새로운 인연의 생명체를 간직하기를 바란다

헤어짐에 대한 소명이 바뀌지 않는 한 새로운 만남에 대한 기대도 달라질 수 없듯이 헤어짐을 짐작하지 못하는 현실주의는 두려움을 탐색하는 불구의 길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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