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億佛』 창간에 대하여
『億佛』은 1955년에 창간한 장흥중ㆍ고등학교 교지였다. 이 교지를 창간한 주역이 김용술 선생이었다. 여러 기억들을 종합해 보면 당시 군사조직과 같은 학도호국단이 생겼는데, 김용술 선생이 그 예산에서 교지를 만들어 정서 교육에도 힘써야 한다고 제안하였다. 이 제안이 관철되었고 문예부 지도교사였던 김용술 선생이 교지의 편집지도도 도맡았다.

장흥중고등학교 교지는 전남에서는 두 번째로 창간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큰 의미와 가치를 갖는 존재였다. 조은숙, 「전쟁, 빨치산 선생님과의 조우」, 『송기숙의 삶과 문학』 ,도서출판 역락, 2009. 283쪽. 인터뷰 내용 중 “조은숙: 한승원의 글을 보니까 선생님께서 장흥고등학교 교지 『억불』을 만들 때 문예부장을 하셨던데요? 송기숙: 내가 처음으로 장흥고등학교 교지를 만들었어. 그 때 광주고등학교 교지가 전라남도에서 유일하게 있었는디.
이 교지는 물론 교지로서 간행된 것이지만 학생 문예지라 할 것이고, 학생 문예지이지만, 장흥의 지역적 특성과 당시의 장흥의 문학 환경과 이 교지가 창간된 시기들을 종합해 볼 때 장흥에서는 처음 간행된 문예물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 장흥의 현대문학을 기록한 첫 페이지로서의 가치에 대하여도 비중 있게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위선환, “나의  『억불(億佛)』 時代”,  『長興文化』 제27호, 장흥문화원, 2005., 159쪽.

77쪽 분량의 창간호에는 김하선 교장의 창간사와 손석연 사친회 이사장의 축사를 필두로 교사들의 논단 6편, 11편의 시(교사의 시조, 한시 번역, 영시 번역 포함), 3편의 수필, 3편의 창작(교사의 단편, 꽁트, 단편 송기숙의 단편 「물쌈」, 위선환은 “장흥에서는 처음으로 발표된 현대소설이 될 것이다.”라고 했다. 위의 글, 같은 쪽.
) 등의 문예 작품이 게재되어 있다. 그밖에 설문, 은사프로필, 학교연혁, 편집후기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창간호에 김용술 선생에 대한 언급은 세 번 나오는데, 하나는 “은사프로필” 난에 “金容구先生 ...(중략) 하두 키가 크시니까 그런 말도 나는 것이지요. 그렇게 키가 크시면 극장에서는 한목 보실 테지만 문턱 드나들 때는 상당량의 주의가 필요할 걸요” 아마도 편집부에서 교사들의 인상을 재미있게 서술하는 난으로 보인다. “큰 키”가 인상적이었던 같다. 또 하나는 은사록(恩師錄)에 “金容구 國語 長興郡長興邑蓴池里”로 기록되어 있다.(‘구’는 인쇄단계에서 ‘?’을 구로 잘못 읽은 데에서 온 오식임) 그리고 편집후기 맨 서두에 “생각 以外로 바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허나 하고 싶은 일을 해나가는 즐거움과 金 先生님의 親切하신 指導의 激勵로 잘됐던 못됐던 이런 定度의 것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편집후기의 말미에는 편집위원 명단이 있다. “宋基淑 李玉敎 劉洪鎭 高在右 金永弘 朴長熙 魏瑄煥” 라고 되어 있어서 지도교사인 선생의 지도를 칭송하고 있다.

이 창간호에서 주목되는 것은 단편 「火葬터」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松峴生”이라는 필명으로 발표된 교사 작품이다. 아주 짧은 작품인데 ‘갑수’라는 주인공이 일제 때인 어릴 적부터 무서운 곳으로 알려진 화장터에 살 집을 짓고 있는 노인을 만나 얘기를 나누는 것이 줄거리다. 오죽했으면 가족과 함께 살 집을 화장터에 짓겠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귀향한 가난한 노인의 처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선생의 작품일 가능성이 크다. 필명으로 발표했다는 것과 그 내용이 그러한 추정을 해보게 한다.

『億佛』이라는 문예지가 창간된 이후, 학생들의 문예활동이 활기를 띠었다. 1957년 가을 위선환(고2)을 주축으로 장흥에서 최초의 문학동인 <돌다리>가 결성된다.
그해 11월 <돌다리> 동인지도 발간했다. 『億佛』 제4호는 <돌다리> 동인들이 편집을 했고, <돌다리> 동인은 1958년 10월 장흥에서는 최초로 ‘시화전’을 개최했다. 위선환, 앞의 글, 160~162쪽. 참조.

 이처럼 『億佛』의 창간은 장흥에서 학생문예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었다. 
 『億佛』은 창간 이후 교사와 학생들의 문예작품의 마당으로 꾸준히 이어 오다가 1972년 장흥중학교와 장흥고등학교가 분리되면서 『億佛』은 중학교 교지로 남고, 고등학교는 새로이  『蹄巖』이라는 제호로 발간하였다.
그러나 이 교지들이 언제 그 맥이 끊어졌는지는 필자로서는 아직 알 수 없다.
1972년 이후 장흥중학교와 장흥고등학교가 분리되어 고등학교 캠퍼스는 건산리 ‘모정등’으로 옮겼다. 50년대 장흥고의 문학동인 <돌다리>의 후신은 30년의 세월이 흐른 후에 탄생했다. 1984년 12월 이대흠을 중심으로 결성된 <文脈>이 그것이다.
이 <문맥>은 동인지도 만들고 시화전을 여는 등 15기까지 이어져 활발한 활동을 했다. 1989년에는 끊어진 교지 『제암』을 재 창간하기도 했다. 이대흠, 정상철, 박계윤 등을 비롯한 <문맥> 출신 문사들은 『億佛』 시대로부터 발원된 장흥고등학교의 문학 전통을 이어받았다고 본다. 이대흠, 「꿈의 나이 문맥의 시절」, 『탐진강 추억 한 사발 삼천 원』, 문학들, 2016. 참조.

◆기억으로 남은 모습에 대하여 

“장흥에 소설가랑 문인이 많은 이유가 김용술 선생님이나 장흥고등학교 교지인  『억불』의 영향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조은숙, 앞의 책, 284쪽.
조은숙이 송기숙과의 인터뷰에서 한 질문이다. 장흥의 현대문학 형성에 영향을 준 여러 일 중에 ‘김용술’과 ‘억불’을 말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억불』이라는 교지는 김용술 선생에 의해 탄생되었으므로 결국 여기에서의 ‘영향’은 ‘김용술’에 귀결된다. 그가 평범한 국어교사가 아닌 문학도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준 스승이라는 점이 오늘날 그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이유일 것이다.

송기숙은 1953년 19세의 나이에 장흥 고등학교에 입학한다. 다른 학생들보다 나이가 많았던 탓에 한때 빨치산으로 활동했던 김용술이 들려주었던 이야기는 송기숙이 역사를 보는 시각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 김용술은 좌익과 우익의 구분은 ‘배부른 자’들의 관념적인 이념이요, ‘정치인들이 만들어 놓은 이데올로기’일 뿐 자신이 빨치산 활동을 했던 것은 ‘밥’의 문제로 양심적인 행위였다고 말한다.

  즉 당시 대부분이 농민이었던 실정에 김용술은 ‘빨갱이’도 ‘흰둥이’도 아닌 농민들이 잘 먹고 잘 사는 사회를 꿈꾸었던 것이다. 송기숙은 이러한 김용술을 통해서 시골 사람들의 가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서 기인함을 자각하게 된다. 조은숙, 「시대를 파수하는 이야기꾼들의 삶: 송기숙의 삶과 문학」, 제7회 한국문학특구포럼 주제발표문, 2017. 10. 28., 1쪽.

 송기숙은 김용술의 영향으로 동학농민운동과 6.25전쟁을 연장선에서 생각하게 된다. 그리고 날마다 자포지재를 넘나들면서 바라보았던 석대들이 동학농민운동의 항전지였음을 알게 된다. 위의 글, 2쪽.

 이처럼 선생은 송기숙의 문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고, 그의 문학적 지향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선생은 송기숙의 작품에 모델로 나타나기도 한다.
백의민족 1968년에서 ‘양 선생’은 송기숙이 장흥 고등학교 재학시절 국어 선생으로 교지를 발간하고 문학적 소양을 갖추게 해 주었던 김용술이 모델이다.

김용술은 빨치산으로 활동하였고, 이후 호국단(우익단체) 학생들에게 붙잡혔으나 평소에 그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던 인물로 다시 복직하여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었다. 그는 송기숙뿐만 아니라 당시의 장흥 중ㆍ고등학교 학생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었지만, 그에게는 언제나 ‘좌익’이라는 이데올로기적 멍에가 따라다녔다. 이런 이유로 송기숙은 김용술을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는 ‘화려한 훈장’이었던 빨치산의 전적이 있어 언제나 반공의 올가미에 걸릴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위의 글, 1쪽, 각주3, 송기숙, 인터뷰, 2008. 4. 2
이 ‘백의 민족’은 ‘양 선생’이 반공주의자인 ‘운동모’에게 간첩으로 오인 받아 봉변을 당하는 이야기이다. 남북분단의 상황에서의 극단적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빚어낸 남한사회의 모순을 그려낸 작품이다.

한승원은 선생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 한다.
친구가 나더러 문예반에 가자고 해서 그 친구 따라서 문예반으로 들어갔지. 담당 선생님이 김용술 선생님이었고, 3학년 다니는 송기숙이 문학 공부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어. 송기숙을 문예반장으로 하고 나는 문예부원이 되었지. 그래서 문예반에 막 들어갔는데 김용술 선생님이 다음 주 금요일에 오면서는 시를 써오든지, 소설을 써오든지 수필을 써오든지 다 한 편씩을 써가지고 오라고 그랬어. 그래서 나는 그때부터 열심히 썼지. 내가 단편소설을 하나 쓴 거야.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한 30장정도 써서 내가 냈지. 누군가에게 읽으라 그랬어. 다 읽고 나니 김용술 선생님이 그걸 다 들어보고 나서 학생들 앞에서 “이 학생은 앞으로 훌륭한 소설가가 될 것이다.”고. 그러니까 잘 못 쓴 소설이었지만 학생한테 용기를 주려고 했겠지. 그래서 그 선생님 그 말씀을 듣고 내가 소설가가 되어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지. 한승원 작가 인터뷰에서 발췌.

이 회고에 의하면 그가 운명적으로 소설가의 길로 들어서게 된 데에는 선생의 “훌륭한 소설가가 될 것이다.”라는 ‘칭찬’이 주효했다는 것이다. 오늘에 와서 보면 선생의 ‘예언’은 적중했다.
송형은 고3때 문예반장이고 나는 고2 문예반원이었으며, 김용술 선생의 지도로 함께 교지 ‘억불’을 창간했다, 우리는 함께 리얼리즘문학을 했다, 나는 신화적 환상적인 리얼리즘 쪽으로, 송형은 끝까지 저항적인 리얼리즘을 표방했다, 송형과 나는 장흥에서 타오른 동학 최후의 치열한 횃불의 부채감을 이기지 못하여, 송형은 ‘녹두장군’을 나는 ‘동학제’라는 대하소설을 집필했다 김선욱, “송기숙의 삶과 문학 조명되다”, 장흥신문, 2017년 11월 6일치

이 글은 제7회 한국문학특구포럼 “시대를 파수하는 이야기꾼 송기숙의 삶과 문학’에서 밝힌 한승원의 회고다. 송기숙과 한승원은 ‘리얼리즘문학’을 했는데, 동학에 대한 부채감으로 송기숙은 <녹두장군>을, 한승원은 <동학제>라는 대하소설을 썼다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적 경향의 근원에는 김용술 선생의 영향이 있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편집회의 자리가 김용술 선생님이 우리를 가르치는 자리였다. 선생님은 잔말을 하지 않고도 많은 것을 가르치는 분이었다. 감화력 때문이리라. 선생님은 따뜻했으나 글에 대해서는 엄격했다. (중략) “똑바로 써야지” 하시면 또 문장이나 문맥이 잘못됐구나 했다. “이거 왜 이러냐?” 하시면 글이 진지하지 못 했구나 했다. 선생님은 “꾸몄어!”하시며 치장한 글을 싫어했다. 또 선생님은 “시시해!” 하거나 “못 써!” 하거나 “이건 배가 나왔어!” “교만해!”하기도 했다.

무엇보다 선생님은 바르고 진실한 글, 튼실한 글을 쓰라 했다. 진지하게 쓰라 했다. ‘글이 사람이다’했다. 이 가르침들은 뒤에 나와 내 문학의 뼈가 되었다. 위선환, 앞의 글, 157쪽
위선환의 이 글은 김용술 선생이 제자들에게 문학을 가르치는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술회하고 있다. 선생은 “바르고 진실한 글”, “튼실한 글”, “진지한 글”을 쓰는 문학정신을 강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까지 내가 기억하는 선생님의 큰 모습을 그때 뵈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큰 키이신데, 술자리가 길어지면 더러 그랬듯, 지난 밤 술자리에서도 바른 문학을 말씀하신 뒤여서 더욱 커 보였을 것이다. “글로 쓴다 해서 다 문학이 되는 것 아니야. 문학은 발라야 해, 그게 문학이지.” 위선환, “김용술 선생님”, 『長興文化』 제32호, 2010)277-278쪽.

제자 위선환이 목포로 은사인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은 당시 목포중고에 근무하고 있을 때였다. 그날 저녁 사제가 만나 술자리를 가진 후 선생의 하숙집에서 자고 난 이튿날 아침에 제자가 먼저 일어나 아직 잠자리에 있는 선생을 보면서 생각한 내용이다. 원래 큰 키의 소유자였지만 그날따라 제일 크게 보였다는 진술인데, 그것은 실제의 체구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 대인의 풍모를 발견했다는 의미이다.
그 이유는 전날 술자리에서 “바른 문학”에 대해 역설한 선생의 사상과 철학에 대해 새롭게 이해했고 감동했기 때문이다.

필자가 광주시에서 개최되는 호남예술제에 대표 학생으로 참여하게 되었을 때 학생의 대외 문예 활동 여비를 학교에서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발의하여 주신 분이 김용술 선생이었다고 황길현 선생이 귀띔해 주셨다. 그 여비를 받기 위해서 설레고 긴장되어 서무과에 들렸더니 마주친 김용술 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 여비 주는 것이 니가 첨이다. 꼭 상을 받아 와야 한다.”
그 기대에 부응해서였을까. 필자는 호남예술제 백일장 시 부문 최고상을 수상하였고 광주일보를 비롯한 지방신문에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가 게재되기도 하였다. 김석중, 장흥 중ㆍ고 교지“억불” 창간호와의 그리운 만남, <장흥신문>, 2018년04월 27일치
김석중의 기억에 남아 있는 선생은 예술제에 참가하는 학생의 여비까지 챙겨주도록 발의하는 자상함과 개인적으로 격려를 아끼지 않은 따뜻함을 지닌 어른이다.

◆마무리

장흥은 조선시대에 이룩한 문학적 성가를 현대에 이어 받아 다른 어느 지역과도 다른 현대문학의 맥을 형성하고 있다. 오늘날 장흥의 현대문학이 지역의 특성으로 자리 잡은 데에는, 그 시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1950년대 중반에 이루어진 장흥고의 문예반 창설과 교지 『억불』 의 창간이 한 축을 이루고 있다는 데에 이견이 없다.
1955년에 장흥고에 ‘문예반’이 생겼고, 아울러 학생들이 문예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으로서의 교지 ‘억불’이 창간되었다.

선생은 교지 창간을 제안하여 그 뜻을 달성하였고, 창간 이후 수년 간 편집을 지도하면서 한 편으로 문학에 뜻이 있는 학생들을 모아 문예반을 만들고 이들을 지도했다. 이것이 장흥 지역의 학생문예 활동을 활성화한 계기가 되었고, 이러한 활성화가 기반이 되어 장흥에서 최초로 문학동인과 동인지도 만들어 졌고, 최초로 시화전이 열리기도 했다. 선생의 제자들 중 문학의 길을 성실히 걸어 온, 성공한 작가 4인의 기억을 통해 이야기한 것처럼 이들에게 선생의 영향은 지대했다고 본다. 그러나 문학으로 성공한 이들에게만 영향을 준 것은 아니다. 당시 선생의 문하에서 국어를 배운 거의 모든 학생들의 기억에는 선생의 올바름의 정신과 철학이 물들어 있다.

선생이 작사한 장흥중 교가와 장흥군민의 노래, 이 두 편의 노래 가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은 “올곧음”과 “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학생들에게는 옳은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를 가르쳤고, 주민들에게는 서로 믿고 마음을 합하는 협동 정신을 통해 부유하고 행복한 미래를 이룰 수 있다는 희망을 제시했다.
남전 김용술 선생은 일제와 한국전쟁, 그리고 남북이 분단된 상황에서의 군사독재 시대를 뚫고 지나면서도 조금도 흔들리지 않고 제자들에게 바른 문학과 옳은 정신을 언행으로 설파한 큰 스승이다.

*참고문헌

▶김선욱, “송기숙의 삶과 문학 조명되다”, 장흥신문, 2017년 11월 6일치
▶김석중, 장흥 중ㆍ고 교지“억불” 창간호와의 그리운 만남, <장흥신문>, 2018년04월 27일 치
▶김재석, 시집 『장흥』, 사의재, 2017.
▶위선환, “김용술 선생님”, 『長興文化』 제32호, 2010.
▶위선환, “나의  『억불(億佛)』 時代”,  『長興文化』 제27호, 장흥문화원, 2005
▶장흥군향토지편찬위원회, “편집후기”, 『長興郡鄕土誌』, 장흥군, 1975.
▶조은숙, 「전쟁, 빨치산 선생님과의 조우」, 『송기숙의 삶과 문학』 ,도서출판 역락, 2009.
▶조은숙, 「시대를 파수하는 이야기꾼들의 삶: 송기숙의 삶과 문학」, 제7회 한국문학특구포럼 주제발표문, 2017.
▶한승원, 작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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