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현대문학이란 강물의 시원이신 김용술 선생
한승원(시인, 소설가)/<기조연설문> 
 

모든 인간에게는 자기 나름대로의 향기(혹은 체취)가 있다. 이 글을 쓰면서 나는 김용술 선생의 향기에 대하여 생각한다.
“영국의 희곡작가 버나드 쇼는 키가 헌칠할 뿐 얼굴은 추남이었는데 그가 미국엘 갔다. 그게 미국의 각 언론에 대서특필되었다. 할리우드의 한 미녀 유명 여배우가 공항으로 마중을 나갔다. 비행기에서 버나드 쇼가 내리자마자 여배우가 달려가서 끌어안고 키스를 했다. 버나드 쇼가 불쾌하여 그녀를 떠 밀치며 그러는 까닭을 물었다. 미녀 여배우가 대답했다. <당신과 결혼을 하고 싶다. 나의 아름다운 미모와 당신의 영특하고 현명한 두뇌 사이에서 태어나는 아이는 얼마나 영특하고 현명한 미남미녀가 태어나겠어요?> 그러자 버나드 쇼가 대답했다. <당신의 멍청한 머리와 나의 흉측한 얼굴 사이에서는 얼마나 흉측하고 멍청한 아이가 태어나겠소?>”

“요절한 시인 김소월의 스승인 안서 기억은 평안도 지방의 대단한 부자였다. 당시(일제 때) 프랑스 유학을 다녀온 김억은 서울에서 살 때 항상 명주 바지저고리에 두루마기를 걸치고 검은 구두를 신고 중절모를 썼다. 돈에 구애 받지 않고 살았던 그의 주의주장은 <돈이란 것은 세어보지 않고 쓰는 데에 가치가 있다>는 것이었다. 서울 문인들 가운데 그에게 밥과 술을 얻어먹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부산의 문인들이 그를 초청했다. 그는 부산행 기차에 올랐는데 여느 때 그랬듯 일등찻간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일본인 차장이 그를 제지했다. 그 일등찻간에는 조선인이 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체구가 큰 김억은 키가 작달막한 차장을 세차게 밀쳐버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앞에서 조선인에게 낭패를 당한 일본인 차장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그를 잡으러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삼등실로 쫓아보내려는 것이었다. 차장이 가보니, 명주 바지저고리 차림은 그 사람은 한 좌석에 앉아 프랑스 시집을 읽고 있었다.(그는 이후 <오뇌의 무도>라는 프랑스 시집을 번역했다.) 일본인 차장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꼬부랑글씨를 읽고 있는 그를 보고 멈칫했다. 이 사람이 조선 사람이기는 하지만 총독부의 대단한 권력자인가보다 하고 생각했다. 차장은 곧 그의 앞에 무릎을 꿇고 못 알아보고 무례를 저질렀다고 사죄의 말을 했다. 김억은 차장의 얼굴을 흘긋 살피고, 구둣발을 차장 앞에 내놓으며 닦으라고 명했다. 당황한 차장이 구두를 닦아주었다. 그는 차장이 착하고 가엾어 보여, 호주머니에서 잡히는 대로 지폐를 꺼내 세어보지도 않고 건네주었다. 차장은 받지 않으려고 했으므로 돈은 바닥에 흩어졌다.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책을 읽기만 했다. 차가 부산에 도착했다. 문인친구들 한 패가 환영을 나와 있었다. 그날밤 그는 호화 요릿집에서 문인들에게 한턱을 야무지에 쏘았다. 그런데 계산을 하려고 하니, 그의 호주머니에는 돈이 한 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위에 인용한 일화들은 김용술 선생이 박용철의 <시적 변용>을 강의하며 들려준 것이다. 하나는 문학인들의 유머와 위트(기지)를 설명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나키스트 같은 문학인의 멋스러운 삶의 단면을 이야기한 것이었다. 김용술 선생은 그러한 유머와 위트를 가지고 호탕한 멋진 삶을 살고 싶어 한 분이었다. 나는 그 가르침으로 인해 ‘문학인은 오탁악세 속에서 참된 삶을 사는 순수한 인격체라’는 인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리하여 그 길로 매진하지 않았는가 생각된다.

고등학교 몇 학년 때였던지, 가을날 전교 학생들(당시에는 학도호국단)이 병영으로 가는 성불리 모퉁이의 탐진강 지류까지 소풍을 겸한 행군을 했다. 교장은 학생들에게 강변의 산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오라고 명했고, 학생들은 모두 가파른 산을 탔다. 그리고 해질 녘에 걸어서 돌아와 운동장에서 종회를 했다. 학생 교사 모두 지쳐 있었는데, 교장은 단상에 올라가 훈화를 했다. 마지막에 내일은 토요일이지만 수업을 예정대로 하겠다고 말했다. 순간 학생들 속에서 웅성웅성 소요가 일어나는 듯싶더니 “쉽시다!”하는 소리들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단상의 교장은 멈칫했고, 앞에 도열한 교사들은 묵묵히 서 있었다. 그들은 학생들의 말대로 다음날 쉬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는 듯싶었다. 그런데 그 중에서 한 교사가 학생들을 향해 <쉬면 썩어!>하고 소리쳤다. 학생들의 소요가 잠잠해졌다. 그 교사가 김용술 선생이었다.

김용술 선생은 흔들리는 세상의 한복판에서 중심을 잡아주는 꿋꿋한 인물이었다.
장흥중고등학교 다니는 동안 문예반 활동을 하면서 나는 문학병이 들었다. 문학병이란 것은, 잘 하던 학과 공부를 젖혀두고 시나 소설을 미친 듯 쓰는 문제아 아닌 문제아가 되는 것이었다. 그 문제아가 나였다. 그 문예반 지도교사 김용술 선생이 아니었으면 오늘의 나는 있을 수 없었다. 선생은 나의 운명을 바꾸어준 은사이시다.
그게 어찌 나뿐이었으랴. 지금 투병중인 소설가 송기숙 선배, 시인 위선환 후배, 소설가 김석중, 시인 백수인 후배, 우리 다음세대의 문학을 이끌어가는 시인 이대흠 후배가 다 그러한 사람들일 터이다.
김용술 선생을 추모하고 그 업적을 기리는 이 사업은 진즉에 이루어졌어야 했는데 늦은 감이 있다. 내가 감히 생각하는 것은 장흥현대문학의 시원의 늪을 마련하신 그 은사님을 위해서 조그마한 돌을 하나 놓았으면 하는 것이다.
발제를 하는 백수인 교수, 토론해줄 위선환 시인 김석중 소설가, 조은숙 교수에게 감사하고, 이 모임을 기획하고 뒷바라지를 해주신 안황권 교수, 김용술 선생의 막내 아드님이자 유족대표인 김옥평 영화사(주)팝콘필름 ㈜오름 회장, 선생님의 추모 사업에 동참해주신 장흥중고등학교 동문과 장흥의 현대문학을 사랑하는 뜻 있는 장흥 군민 여러분들에게 깊이 감사한다. 

장흥의 현대문학 형성과 김용술 선생
백수인 (조선대 교수, 시인, 문학평론가)/<발제문>

1. 들어가며

장흥은 지난 2008년 문화체육관광부로부터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 받았다. 전국에서 최초일 뿐만 아니라 아직 유일하다. 장흥이 “문학관광기행특구”로 지정받은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장흥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의 본산으로 알려져 있다. 장흥은 우리나라 기행가사의 효시로 알려진 “관서별곡”을 쓴 기봉 백광홍을 필두로 위세직, 위백규, 노명선, 이상계, 이중전, 문계태 등 가장 많은 가사작가를 배출하였고, 그들이 창작한 가사 작품의 양 또한 가장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장흥은 이러한 문학 전통을 현대에 계승하여 다른 지역에 비해 우리나라 문단에서 손꼽히는 훌륭한 문학 작가들을 많이 배출하였고 그 활동이 문단에서 괄목할만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작가 한강이 2016년 아시아작가로는 최초로 맨부커상을 수상하자 다시 한 번 ‘문학 장흥’이 세간의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김재석은 이러한 문학적 면모를 장흥의 특성으로 파악하고 있다.

할 말을 입으로 하지 않고 / 눈빛으로 하는 / 산들의 전언을 / 다들 나름대로 받아쓰고 있다 // 송기숙 / 이청준 / 한승원 / 김석중 / 이승우 / 백성우 / 김현주 // 김재현 / 정재완 / 위선환 / 이한성 / 전기철 / 백수인 / 조윤희 / 윤석우 / 이대흠 / 장일구 // 할 말은 입으로 하나 / 수국水國의 말로 하는 / 탐진강의 전언을 / 다들 나름대로 번역하고 있다
언’과 ‘탐진강의 전언’을 “나름대로 받아쓰고”, “나름대로 번역하고 있다”고 하여 장흥의 자연 환경과 문학 창작과의 연관을 말하고 있다. 장흥의 산과 강과 바다와 같은 자연 풍광도 중요하겠지만 무엇보다도 문학에 대한 교육과 문학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환경 등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일찍이 장흥의 중등교육기관으로는 장흥중고등학교가 있었고 통상 거기에서 국어교육의 일환으로 문학교육이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는 다른 지역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멈추고 학교교육이 비로소 자리를 잡아갈 무렵인 1955년에 장흥고에는 여러 분야의 특별활동이 이루어졌는데 이때 ‘문예반’이 생겼고, 아울러 학생들이 문예작품을 발표할 수 있는 지면으로서의 교지 ‘억불’이 창간되었다. 이 문예반 활동을 통한 창작 교육과 교지 ‘억불’의 창간의 한 가운데 남전 김용술 선생이 위치해 있다.
따라서 장흥의 현대문학 형성에 김용술 선생이 상당한 교육적 영향을 끼쳤다고 보고 그의 삶을 조명해 보고자 한다.

2. 선생의 삶과 남긴 글에 대하여

연보에 따르면 선생은 1924년 6월 16일 전남 장흥군 장흥읍 순지리에서 태어나서 1983년 3월 1일 향년 60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일제강점기에 장흥보통학교를 졸업하였고, 함흥고보를 거쳐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했다. 해방 직후인 1946년 10월 9일 장흥중학교의 개교와 함께 국어교사로 부임하였다. 이후 줄곧 장흥중고등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다가 1961년 6월부터 1963년 2월까지 약 1년 8개월간 목포중학교에서 근무하다가 다시 장흥중학교로 돌아와 장흥에서 교사와 교감으로 봉직했다. 1979년 3월 진도군내중학교 교장으로 승진 전보되기 전까지 약 31년간 장흥중고, 장흥여중 등 장흥에서 근무했다. 이후 화순교육청 장학관을 거쳐 칠량중 교장을 마지막으로 일생을 마쳤다.
1975년에는 장흥군향토지편찬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아 장흥에서는 최초로 향토지 편찬을 주도했다. 나중에도 얘기가 나오겠지만 그는 장흥고 교사로 있던 한국전쟁 때 빨치산으로 입산한 경력이 있다.
 이 때문에 그의 삶은 “반공을 국시”로 삼은 군사정권 시절에 함부로 이름을 내놓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한다. 따라서 그가 자신의 사상을 문학작품이나 글로 써서 발표하기를 주저했을 것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사유를 남긴 글은 별로 발견되지 않는다. 다만 장흥중학교 ‘교가’와 ‘장흥군민의 노래’를 작사했기 때문에 그 노랫말을 통해 그가 지닌 사상의 일단을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1. 산 높고 물도 맑은 호남 장흥에 / 창공에 높이 솟은 불멸의 탑은 / 해방의 서기 어린 배움의 터전 / 거룩하다 우리 학당 장흥중학교
2. 억불산 푸른 정기 우리의 기상 / 탐진강 맑은 물은 우리의 지조 / 쏟아라 타는 정열 진리 탐구에 / 거룩하다 우리 학당 장흥중학교
   -“장흥중학교 교가” 노랫말 전문

1절에서는 장흥중학교를 “불멸의 탑”으로 은유했고, “해방의 서기”가 어려 있는 “배움의 터전”이라고 했다. 이는 학교교육이란 미래의 역사에서 절대로 없어져서는 안 될 존재로 인식했다는 것이고, 여기에 민족이 해방된 상서로운 기운을 결합시켜 해방된 조국의 밝은 미래를 염원했다.
2절에서는 학생들에게 기상과 지조, 그리고 정열로 진리탐구에 매진하라는 격려의 의미를 담고 있다. 저마다 타고난 올곧은 마음씨와 그것이 겉으로 드러난 모양이 ‘기상’이고, 옳은 원칙과 신념을 굽히지 아니하고 끝까지 지켜 나가는 꿋꿋한 의지가  ‘지조’다.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맹렬히 불타오르는 적극적 감정이 ‘정열’이다. 그는 이러한 젊은이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진리를 탐구하는데 힘쓰라는 메시지를 표명한 것이다.

1. 국사봉 정기 뻗어 천관에 맺히고 / 남해바다 푸른 물결 희망 부푸네 / 이 들과 저 바다는 우리 살림터 / 손잡고 땀 흘리어 살찌워 가세 / 금수강산 남쪽 땅 복된 내 고장 / 그 이름 장흥 장흥 길이 흥하리
2. 탐진강 산을 스쳐 들을 누비니 / 강산도 아름답고 인심도 곱네 / 조상의 피와 얼이 서려 있는 곳 / 힘과 마음 합쳐서 가꾸어 가세 / 금수강산 남쪽 땅 복된 내 고장 / 그 이름 장흥 장흥 길이 흥하리
-“장흥군민의 노래” 노랫말 전문

1절의 내용은 장흥에 펼쳐 있는 산과 바다, 그리고 들판은 장흥 주민들의 일상생활의 터전인 “살림터”라는 것이고, 이 “살림터”를 바탕으로 서로 협력하여 열심히 일하여 부유한 공동체를 이루자는 것이다.
2절은 장흥의 아름다운 강산과 고운 인심을 찬양하며 장흥 땅의 역사적 전통을 되새기며 이러한 복된 땅을 우리 주민들은 서로 협동하여 가꾸어가자는 내용이다. 후렴구에는 장흥은 “복된 땅”이며 장흥의 한자 의미처럼 “길이 흥하”기를 염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두 편의 노래 가사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상은 “올곧음”과 “협동”이라고 할 수 있다.
선생은 1975년 『長興郡鄕土誌』를 편찬해 낸 바 있다. 이 책의 “편집후기”는 그가 썼을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선생의 직책은 편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되어 있지만, 실질적 편찬을 주도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임원진을 살펴보면 당시 최정학 군수가 위원장이고 2인의 부위원장이 있는데 부군수와 김용술 선생(장흥여중 교감)이 맡았다.
그리고 고문 3인(국회의원, 경찰서장, 교육장), 자문위원 5인(향교 전교, 유도회 고문, 한학자), 감수위원 1인(김두헌) 편찬위원 12인, 총무위원 6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와 같은 구성을 보면 형식적인 인물들이 다수임을 알 수 있다. 이들을 제외하고 보면 선생과 12인의 편찬위원이 실질적으로 편찬 업무를 수행했을 거라는 것은 자명하다. 따라서 편찬을 주도한 책임자로서 마지막에 “편집후기”를 집필했을 것이다. “편집후기”란 편집을 마치고 난 후에 쓴 글로 의례적인 감사 인사, 편집과정에서의 에피소드, 어려운 점, 보람된 점 등을 술회하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한 부분에 선생의 특유한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

 編纂過程에서 艱難辛苦 本郡의 沿革變遷年代表를 完成했을 때는 喜悅도 맛보았지만 護國英靈의 記名을 할 때 문득 故友의 姓名三字가 마주치면 저도 모르게 肅然해지면서 가슴에 소리 없는 嗚咽을 느끼기도 했다.
-장흥군향토지편찬위원회, “편집후기” 중에서 장흥군향토지편찬위원회에서 간행했고, 발행인은 장흥군수, 인쇄인은 전남매일신문출판국이며, 발행일은 1975. 04.12.이다.
 
이 짧은 서술에 한국전쟁과 민족 분단의 슬픔이 배어있다. 나라 위해 목숨을 바친 자들의 명단에서 옛 친구의 이름 석 자를 보았을 때의 심정을 “가슴에 소리 없는 오열”이라고 표현했다. 이것은 편찬위원회가 공통으로 느꼈던 것이 아니라 이 글을 쓴 개인의 감정이라고 할 것이다. 이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남다른 위치에서 견뎌냈던 선생의 감정이라고 생각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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