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기록에는 여러 임씨들이 등장한다. <세종실록지리지>의 장흥 土姓으로 ‘장흥부 任氏’와 ‘장택 林氏’가 있었다. <정묘지,1747>에 土姓으로 ‘회주,어산- 任氏’, ‘장택- 林氏’가 나온다. 돌이켜, 고려시대 우리 장흥府 승격은 ‘공예태후(1109~1183) 任氏’ 때문이다. 남편 인종의 왕비지위가 아닌, 아들 의종의 母后(太后)지위에 연유하여 의종3년(1149)에 승격된 것. 장흥 任氏는 고려의 ‘宰相之宗’ 벌열로 고려 무신정권기에도 건재했었다.
오늘은 세상이 크게 뒤바뀐 조선시대 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 장흥의 토성, ‘장흥 땅’의 장흥 任氏 집안
조선 성종 때 ‘임득창(1445~1494)’이 있었다. 진사시 출신으로 1472년에 무과 장원 급제하였고, ‘주청사 사절단’으로 중국을 다녀왔으며, 온성도호부사를 역임하였다. 빠른 죽음이었지만, ‘시대의 名將, 무신 將才’라는 평가를 받았다.
‘任得昌’은 ‘용산 운주동’에 모셔졌다.(또 장흥 관련기록에 나오는, 장흥任氏들, 세종 때 전라관찰사 ‘임종선’, 장흥부사 ‘임응룡,임만기,임경관’, 문과급제자 ‘임장원,임일원,임제원’ 등은 장흥府 태생들은 아니었다.) ‘용산 어산’의 任氏는 ‘운주, 인암, 봉황’으로, ‘임득창-임광세- 백담 임희준’의 후손 분파는 자울재 넘어 ‘장흥읍 덕제’에도 자리 잡았다. ‘임광세’의 아들 7형제가 여러 곳으로 분산되었던 것.

- ‘보성 조양’으로 이거한, 장흥 任氏 집안
‘임득창-임광세’를 잇는 ‘국담 임희중(1492~ )’은 1511년경에 ‘보성 조성(축내)’로 이거하였다. ‘任希重’은 명종 때에 진사시1위,생원시2위의 사마양과 입격자이다. 그 아들 ‘임백영,임계영’이 문과급제자로, ‘임계영’은 임진란 때 보성과 장흥에 기반한 ‘전라좌도 의병장’이었다. ‘임희중’은 본향 장흥 ‘장천동 분암’을 두고 떠난 회한을 <국담유고>에 남겼다. ‘임원후(1089~1156)’ 4남으로, 공예태후와 남매지간 ‘임유(임극인,1149~1212)’와 그 아들 ‘임경숙’ 등 선조분묘가 ‘천관산하 長川洞’에 있었다. <정묘지>의 ‘회주 土姓 任氏’에 해당할 것.
*장천동
萬古長川洞 壘然遠祖墳 /만고세월 長川洞이여, 누연한 조상 분암이여
澤窮祠祀廢 世易子孫存 /택궁하여 廢제사 처지, 바뀐 세상에도 자손 있으니
狐穴嗟何難 鳩居痛莫言 /穴處 앞에 어찌 탄식할까, 손님 집차지에 애통해라
山英亦差激 我過閉陰雲 /山英靈도 부끄럼 넘쳤나, 내 앞을 먹구름이 막는다.

- ‘해남 계곡’으로 이거한, 장흥 任氏 집안
한편 ‘임득창-임광세- 난실 임희성’을 잇는‘임발영(1539~1597)’ 집안은 해남 계곡으로 이거하였다. ‘任發英’의 부친 ‘任希聖’은 ‘임희준,임희중’의 동생이다.(즉 임희준-장흥, 임희중-보성, 임희성-해남으로 갈라졌다). ‘임발영’은 사마시 출신에 선전관 특채를 거친 무과급제자로서 文武겸비하였고, 임진란 때 선조를 호종한 ‘호성공신(扈聖功臣)’이다. 본인은 ‘예양군’, 부친은 ‘관흥군’, 조부는 ‘관산군’으로 추봉되었다. 그 ‘예양, 관흥, 관산’ 봉호가 ‘任氏 貫鄕 장흥’에서 연원했음은 물론이고, 조부 임광세 묘소도 ‘장흥 장평 압곡’에 있다. 한마디 덧붙인다. ‘장흥 땅, 장흥 任氏’들의 재흥을 이제 다시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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