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7대 인종 왕비 공예태후 임(任)씨 탄향지가 관산읍 당동마을이여서 1149년부터 1379년까지 전남도 서남부 중심 고을의 치소(장흥부(府)?회주목) 였던 방촌마을에 장흥위씨들이 언제부터 정착하였는지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관산읍 당동마을
  백제때 이루어진 마을로 1040년경 장흥임(任)씨 시조 임호께서 중국 절강성 소흥부에서 건너와 천관산 아래 관산 당동마을에 정착한 후 탐진최씨, 장흥위씨 등이 이주하였다.
위유형의 관산파 후손 위진현 세대에 당동으로 이거하면서 방촌마을로 입향하게 되는데 위진현이 용산면 어산마을에서 거주하다가 정착했던 당동 마을에 유장비(遺莊碑)가 세워져 있다.
당시 위진현이 당동으로 옮겨와 살게 되는 연유는 참봉공 진현의 부인 탐진최씨는 당동에 살고 있었고 위곤과 위곤 아들 5형제는 모두 당동에서 태어나셨고 점차 세월이 흘러 이웃마을 또는 인접지역으로 분가한 것을 기준으로 작성해본다.

< 장흥위씨 관산파 5덕(德)가계도>
곤(진사공)
①덕홍(판사공) -당동마을
②덕의(청계공) -옥산마을
③덕관(운암공) -부산기동마을
④덕화(판서공) -방촌마을
⑤덕후(안항공) -방촌(안항)마을

■장흥 평화촌
 평화마을에 장흥위씨 관련 유적으로 백산제(柏山齋)는 2009년에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272호로 지정되었고  2016년 5월 장흥위씨 도문회에 의해 회주사(懷州祠)로 명칭이 바꿔졌다.
지금 백산재(柏山齋)강당자리에 건립시기가 확실하지 않은 초가 위유형 묘각이 있었으며 그 곳 지명을 따라 다산재(茶山齋)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나 그 건물이 너무 낡아 1936년 운암공 11대 손 위원량(1882~1945)은 자기 집 사랑채를 옮겨 다시 건축하여 오늘에 이르는데 그 건물은 1895년 신축한 장흥도호부 동헌(관아) 건물을 1934년 철거하자 자체 구입하여 사랑채로 사용하던 건물이 ‘장흥 위씨 도문중 재각’으로 변신한 것이다.

 ■관산읍 방촌마을
고려시대 아전(관리)들은 조선시대에는 토착지배층으로 장흥고을(정안현) 치소 또는 전남서남부 중심고을(회주목)치소였던 지금의 방촌마을에 거주하였으나 성리학이 보급되는 조선시대가 되면서 위축되었던 세력들이었다. 그래서 장흥위씨와 옛 토착세력 후손들이 사회변화와 함께 자연스럽게 교대되었을 것이다.
1454년 이전에 지금의 관산읍 방촌마을이 장흥위씨의 터전으로 정착되지 않았던 것 같다. 당동마을에 정착한 장흥위씨들은 다시 새로운 곳으로 생활근거지를 옮긴 곳이 ‘방촌’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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