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지재 이상계(1758~1822) 선생’, ‘계서 백진항(1760~1818) 선생’은 장흥 용산(南)면 동향 출신으로, 동시대 인물들이다. 그들 문집, <지지재유고>는 ‘이병혁 후손’이, <계서유고>는 ‘박경래 선생’이 국역하였다. 어떤 처사이든 유고를 통하여 그 면모를 짐작하게 되는데, 서로 엇비슷한 처사들이면서도 꽤 다른 바가 있다. 이미 번역된 <지지재유고>와 <계서유고>를 합쳐 대비해 봄도 先賢들을 이해하는 한 방법이 될 것 같다. 향촌처사들 유고는 당시 향촌생활과 시대상을 알려주는 기록문학으로서 시대적 표지가 된다는 점에 그 의의가 크다.
 
이하, 두 분 先生을 살펴본다.
그 시절 인천李씨, 수원白씨의 대표적 선비들로, ‘지지재 선생’은 ‘청강 이승(1556~1628)의 7대손이고, ‘계서 선생’은 ‘정해군 백수장(1469~1543)’의 후손이다. 위백규(1727~1798) 선생보다 한 세대 늦어 ‘존재 선생’의 동생 또는 아들들과도 교분이 있었다. ‘지지재 선생’은 애초 과거공부를 제대로 못했고, ‘계서 선생’은 나중에 과거공부를 중단하였다. 같은 草堂처사로 草堂생활을 하였지만, 그 내력에 차이가 있다. ‘지지재 선생’은 1808년 부친 타계 후에 그 시묘과정에서 ‘孝, 草堂, 초당處士’로 연결되었던 것 같다. ‘지지재(止止齋)’는 초당 당호로 “孝와 善이 머무는(止), 또는 자신을 알고 스스로 그치는 곳”이라는 뜻이다. 반면에 ‘계서 선생’ 역시 孝友칭송을 받았지만, ‘계서초당’은 재야 선비의 독서실(서재) 역할이 컸던 것 같다. 그 ‘계서초당’ 옆에 ‘열호정, 환앵정’을 따로 마련하였다.( 그 일대가 나중에 칠리안 草堂마을로 성촌되었다) ‘지지재 선생’은 굽은 소나무처럼 평생 고향 땅을 지키면서 부친(은정 이종진)의 孝德을 이어받아 선산 草堂에서 계속 살았다. 그 주변 ‘아양동’ 산천을 바라보며 자연친화적이고 관조적인, 또한 자기성찰적 내면을 드러내는 안빈낙도의 시를 남겼다. 60세에 이르러 ‘冠山 구로회’를 결성하여 관내 ‘일림사, 보림사’ 등에서 詩會를 가졌다. 반면에 ‘계서선생’은 10여년간 10회 정도 서울 출입을 통하여 외지문사, 문중종인들과 교류가 있었고, ‘금강산을 비롯한 ‘관동24경’을 유람할 정도로 자칭 ‘탐유객’에, 천여권 도서 ‘수장가’였으니, 외부에서 체험한 객관적 식견에 관한 기록정리적 면모가 탁월하였다. ‘지지재 선생’은 17세에 모친이 돌아가신 가정사가 그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반면에 ‘계서선생’은 비록 12세에 부친 백시봉(1738~1770)이 별세하셨지만 조부 밑에서 그 나름 공부를 계속할 수 있었다. ‘지지재 선생’에 대해 1817년에 부임한 장흥부사 민치성(1773~1858)은 ‘금세군자 특립독행(今世君子 特立獨行)’이라 칭송했다. ‘계서 선생’에 대해서는 젊은 날 스승(동강 이의용)은 ‘사문아망(斯文雅望)’으로, ‘존재 선생’은 ‘시원하고 활달한, 쇄락호웅(灑落豪雄)’으로 지칭했고, ‘지지재 선생’은 계서를 추모하는 만사(輓詞)에서 ‘추수정신(秋水精神)’으로 애도하였다. ‘지지재 李초당’은 ‘草堂팔경, 草堂歌’와 유자(儒者)관점에서 ‘인일(人日)가’를 남겼다. ‘계서초당 白선생’은 ‘기봉(백광홍)’의 유문을 수습하고 ‘옥봉(백광훈)’의 詩현장에 관한 ‘謹차운시(7편)’, ‘수원백씨 집안에 관한, 家史별록,家傳疑事’와 <계서만필>을 남겼다. 거칠게 줄여보면, ‘지지재 선생’은 내향적인 면모, ‘계서 선생’은 외향적인 면모였던 것 같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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