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유산」은 단순히 역사책에만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모두가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할 소중한 자산입니다. 그래서 향토문화유산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려고 우리 고장의 차별화된 문화유산과 관련된 문헌을 참고하고 현지를 탐방하면서 어르신을 만나 진솔한 이야기를 경청했습니다.

나 혼자만 알고 있는 것보다 ‘정남진 장흥’을 이해 하고자 하는 귀인들과 함께 공감하려고 연재합니다.

기봉 백광홍선생이「관서별곡」을 1555년에 지었는데 1556년 35세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동안에 알려지지 않았던 것을 1963년 이상보 교수 논문으로 학계에 널리 알렸다.
「관서별곡」은「관동별곡」보다 25년 앞선 작품으로 우리나라 최초 한글(국문)로 지은 기행가사이며, 오늘날 『정남진 장흥 문학관광기행특구』를 만들게 했던 계기가 되었기에 그 내용을 정리하였다.

■장흥에 유배왔던 신잠과 백광홍 관계
신잠(申潛 1491~1554) 선생은 1521년부터 1538년까지 17년간 장흥에서 유배 생활할 때 태어난 백광홍(白光弘: 1522~1556)에게 학문을 접하게 하는 등 장흥지방의 문풍 혁신에 크게 기여하여 그 유덕을 기리기 위해 1610년 향론의 발의로 장흥읍 예양서원을 건립하여 배향하고 있다.
신잠은 유배생활을 마치고 1544년 태인 현감으로 있을 때 22세 된 백광홍을 호남 성리학의 3대 인물 이항(李恒1499~1576)에게 본격적인 학문의 길로 들어가게 주선했다.

■ 젊은 시절에 생을 마감
백광홍 선생은1552년 과거시험 합격하여 홍문관 정자(正字)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 1553년 32세 호당(학문연구기관)에 선발되었다.
1552년에 왕명으로 성균관에서 호남과 영남 문신들에게 시재(試才)를 겨루어 장원으로 뽑혀 명종 임금으로부터 특별 하사 받은 선시(選試)10권을 지금까지 문중에 보관하고 있어 2010년 보물 제1664호로 지정되었다.

1555년 34세 되던 봄에 국경지역을 보살피는 평안도 평사(評事)가 되어 민폐를 보살피면서 그곳의 삶과 정취, 자연풍물을 한시로 음영(吟詠)하였다.
그 가운데 국문으로 쓴 우리나라 최초 가사작품『관서별곡』은 송강 정철『관동별곡』보다 25년 앞서 백성에게 널리 불려졌다.
그동안 백광홍 기봉집은 학계에 크게 알려지지 않아 연구자들의 관심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다음호에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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