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불산, 혹은 억불이 이름은 단순한 산의 이름 그 영역을 뛰어 넘어서 장흥 사람들에게는 수많은 추억과 그리움을 안고 있는 상징성으로 다가 온다.

4,50년전 장흥읍 관내의 초ㆍ중ㆍ고에 재학중이던 학생들은 해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봄 가을의 소풍 중에 한번은 억불산 중턱 큰 소나무 아래가 행선지였다.
읍내에서 바라보면 억불의 흘러내린 능선에 한 폭의 추상으로 그려지던 큰 소나무. 막상 멀고 가파른 산길을 걸어 도착하면 의외로 밍밍하던 그 능선에서의 소풍은 잊혀지지 않은 추억이었다.

학창시절의 소풍으로 기억되는 ‘억불’은 장흥중ㆍ고 학생들에게는 또 다른 이미지로 각인되어 있다. 학창시절 문학을 꿈꾸던 학생들이 작품을 투고하고 자신의 작품이 실린 교지를 받아 들고 마치 문학가가 된 것처럼 고독한 폼을 잡게 해 주었던 매체가 교지 ‘억불’이기 때문이다.

1964년이던가? 필자는 억불지 편집 위원이었다. 지도 교사는 전북대학교 국문학과 출신이며 ‘원탁’동인으로 활동하시던 시인 황길현 선생이었다.
필자를 많이 편애하고 문학적 감성을 끌어 올려 주셨던 그 시대의 시인 같은 언행을 보여 주신 교사였다.
황길현 시인 선생님께서 필자를 억불지 편집위원으로 선정해 주셨고 교지 초고의 교정일도 거들었다. 장흥읍 동동리 경찰서 아래 장흥 중ㆍ고 교사 분들의 관사 골목 그쯤에 ‘장흥인쇄소’가 있었다. 필자와 동창인 정규훈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인쇄소였다.

인쇄소 한쪽 벽면을 가득히 채운 납 활자대에서 활자를 뽑아 조판을 하고 초벌 인쇄가 끝난 교정지를 활자를 골라 다시 조판을 하던 지루하고 수동적이던 인쇄소... 그 인쇄소에서 교정을 보았지만 실제로 감각과 안목은 인쇄소 주인 어르신을 따를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필자에게는 생경하고 경이적이고 자랑스러운 경험이었고 그 경험은 황길현 선생의 배려였다. 교정 중에 ‘흥미식당’에서 배달하여 먹었던 자장면의 맛은 00여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아쉽게도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하여 간행된 억불지가 몇호 였는지 필자의 어떤 작품이 실려 있었는지 자료도 없고 기억도 없다.

그러나 이 원고를 쓰면서 억불지를 매체로 하여 문학병을 앓던 문학도로 멋을 뽐내던 선후배 몇몇 이름들이 스멀스멀 기억되어 오는 것이다.
1-2년 선배였던 강상구, 이기성, 김유근 그 선배들이 문학을 하기 위해서는 배워야 한다고 장흥 극장 위쪽 동동리통 선술집에 앉혀 놓고 술을 먹이던 고통스러웠던 기억, 비교적 조용하게 문학반을 출입하던 이성관, 백학근 선배, 동기중 황길현 선생의 칭찬을 많이 듣던 이숙희, 정옥채 1년 후배이던 이인제, 문학반도 아니었는데 억불지에“민선생....” 이런 제목의 소설 같은 산문을 게재하여 황길현 선생께서 극찬한 이정국... 그 선배들과 동기들과 후배들의 소식은 아득한 옛 이야기로만 남아 있다.

10여년 전이던가. 문득 생각이 나서 장흥고등학교를 찾아가 혹여 억불지가 보관되어 있는지 수소문해 보았다. 참으로 아쉽게도 단 한권의 교지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을 듣고 얼마나 아쉬웠는지.

근간에 들어 한승원작가께서 발의하여 장흥중ㆍ고에서 특활 문예반을 지도하고 억불지를 창간하여 장흥의 문맥을 조성하신 김용술선생의 행적을 조명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그 과정에서 혹여 누군가가 억불지를 소장 보관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안고 수소문해 보았다. 다행스럽게도 위선환시인께서 창간호와 6호를 소장하고 있었고 광주에 계시는 서용주목사(송기숙작가 동기. 전계림교회, 무돌교회 담임)께서 창간호를 보관중이셨다.
특히 서목사께서 보관 하셨다가 장흥중학교(교장 이영송)에 기증한 창간호는 보관 상태가 거의 완전 하여 그 사본을 넘기고 읽으면서 수 없이 많은 이야기가 기억되어 지는 것이었다.

 

 

 

 

 

 

 

 

 

 

 
단기4288년 8월31일(서기1955년)에 간행된 창간호의 표지는 컬러였다. 그 시대에 컬러 표지를 채택 한것도 놀라웠거니와 억불산 그림과 제호의 서체가 지금의 시대에 평가해도 그 디자인이 수준있어 보였다. 서지 사항을 보니 억불지 창간호는 광주시에 소재한 ‘주식회사 동아사’에서 인쇄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편집자는 장흥중고등학교 학예반 발행처는 학도호국단이었다.
77쪽 분량의 억불 창간호에는 중고등학교의 연혁 은사 프로필 등이 수록되어 있어서 당시의 학교 사정을 추억하게 해 주었다.
무엇보다 10년 안팎의 선배들중 어느 이름들이 작품을 게재하였는가가 궁금하였다.

우선 눈에 들어오는 이름이 송 기숙 ‘물 쌈’이라는 창작 소설,그리고 위선환의 시 ‘시골’이 옥교(장흥군청재직, 작고)의 시 ‘고독’ 위자형의 산문은 영문 제목으로 ‘THE NEW WAY’였다. 송 기숙, 위선환 이 두분은 이미 중견 소설가와 시인으로 그 명성이 회자되고 있거니와 억불 창간호에 실린 이 작품들이 어쩌면 최초로 활자화된 처녀 작품일 것이다

제학생들로 구성된 편집위원 명단에도 아는 이름은 송기숙, 위선환 이옥교 였다.
당시 송기숙은 고교 3학년 위선환은 중학교 3학년쯤 이었을까.
필자가 재학중 일때의 장흥중고는 남녀 공학이었고 교장은 한 분, 교감은 중고에 각 한분씩 재직했던 것으로 기억되고 있으니 억불지의 편집위원도 중고 학예반(혹은 문예반)공동으로 참여한 것으로 추정된다.
창간호 이후에 김용술선생의 지도에 힘입어 문학의 열정을 형상화하여 억불지의 편집에 참여하고 최초의 창작 소설을 게재한 한승원 작가의 회고에는 억불 그리고 김용술선생에 대한 한 없는 그리움과 애정이 내재되어 있다. 한승원작가는 김용술 선생과 억불지가 자신을 소설가의 길로 인도한 계기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다시 억불 창간호 발행 후 9-10년 후로 돌아와 보자.
당시 문예반 지도 교사는 황길현 선생이었고 김용술 선생은‘말본’‘고문’을 가르쳤던 것으로 기억 된다.(이 기억이 맞는지 모르겠다. 50여년 세월이 흘렀으니)
문예반은 굉장히 활발해서 억불지 외에도 프린트물로 부정기적인 회지도 발간했고 칠거리통의 ‘정원다방’에서 시낭송회를 열어서 청소년의 문학 활동을 과시했다.
그 즈음에는 필자가 편집위원으로 참여했던 억불지는 앞서 기술한바와 같이 장흥읍 동동리 골목길의 ‘장흥인쇄소’에서 발간하였다.

칠거리에서 기양리, 남동리, 동동리로 이어지는 상가와 골목은 당시 장흥읍 상권의 중심지로 5일시장과 차부(시외 버스 정류장)로 연결되고 극장과 당구장, 사진관과 여관, 다방과 요정이 성업하고 있었으며 법원과 검찰청은 6개군을 관활하고 있어서 유동 인구도 많았고 그러한 상가의 다방과 선술집을 기웃거리는 청소년 문학도들의 낭만도 아름답게 회상되어 오는 것이다.

문예반이던 필자는 이런 학내외의 분위기에 편승해 열심히 습작을 하였고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으로 당선되어 전교생이 모인 조회에서 상장과 상품을 받았으며 그 때 받은 상품이 모윤숙의 ‘렌의 애가’였다. 황길현 선생은 교외의 큰 문학 행사에 학생들을 참여시키려고 많은 애를 썼다.

남도문화제, 호남예술제, 전북대학교개교 기념 백일장 등에 장흥고등학교의 문예반 학생들이 참여 하였다. 그 즈음의 김용술 선생은 큰 키에 대단히 엄격한 언행으로 학생들이 어려워 하였지만 유독 문예반 학생들을 격려하고 지원해 주었다.

필자가 광주시에서 개최되는 호남예술제에 대표 학생으로 참여하게 되었을 때 학생의 대외 문예 활동 여비를 학교에서 지원해 주어야 한다고 발의하여 주신 분이 김 용술 선생이었다고 황길현 선생이 귀뜀해 주셨다. 그 여비를 받기 위해서 설레고 긴장되어 서무과에 들렸더니 마주친 김용술선생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우리 학교에서 학생 여비 주는 것이 니가 첨이다. 꼭 상을 받아 와야 한다”
그 기대에 부응 해서였을까. 필자는 호남예술제 백일장 시부문 최고상을 수상하였고 광주일보를 비롯한 지방신문에 사진이 곁들여진 기사가 게재되기도 하였다.

전국 최초로 회자되는 ‘문학관광기행특구’장흥의 문학, 그 문맥을 정리하여 본다면 장흥중고 교지인 억불과 김용술, 황길현 같은 의식있는 교사들의 지도에 힘입은 장흥중고 문예반 출신의 작가들이 장흥의 문학현장과 한국문단에서의 활동과 명성으로 확인 가능할 것이다. 근간에 억불 그리고 김용술선생의 행적을 조명하여 장흥문학사를 점검해 보려는 시도는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昊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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