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군은 지난 27일 장동면 해동사에서 안중근 의사 추모 행사를 가졌다. 안중근 의사 기념사업회(회장 안종덕)가 주관한 이날 행사는 기념사업회 회원과 유림 200여명이 참석했다.

안중근 의사 추모 행사는 매년 음력 3월 12일에 맞춰 장흥군 장동면에 위치한 해동사에서 개최된다.
해동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안중근 의사의 위패를 모셔놓은 사당이다.

해동사는 지난 1955년 장흥에 살던 유림 안홍천(죽산 안씨)이 순흥 안씨인 안중근 의사의 후손이 없어 제사를 지내지 못하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이승만 대통령에게 건의, 죽산 안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해동사의 현판인 해동명월(海東明月)은 이승만 대통령의 친필로 전해지며, 사당 내부에는 안중근 의사 영정 2점과 친필유묵 복사본이 보관돼 있다. 1984년 전남도 문화재자료 제71호로 지정됐다.

이날 해동사와 맞닿아 있는 만수사에서 죽산 안씨 문중행사를 마친 참여자들은 해동사에 모여 추모 행사를 가졌다.
이날 추모 행사에서 초헌관은 위삼섭 장흥부군수가, 아헌관은 장흥교육청 교육장 백인기, 종헌관은 장흥문화원장 이금호가 맡았다.

장흥군은 해동사를 우리의 바른 역사를 알리는 지역 역사와 문화관광 명소로 가꾸고 청소년 교육의 공간으로 발전시켜 나가겠다는 계획으로 여러 가지 행사를 실시하고 있다.

지난해 전남교육청에서는 고등학교 1학년생 120명과 인솔자 30명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중국 대련의 '뤼순감옥'을 비롯한 생가, 단지(斷指) 동맹을 결성한 독립운동의 현장인 러시아 국경도시 크라스키노, 지사가 가장 존경했던 이상설 선생의 유허비가 있는 러시아 우수리스크 등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이동하며 우리 민족과 역사의 길을 탐방하기도했다. 이상설선생은 안중근의사의 정신적 지주이자 스승이였다.

보재 이상설선생 기념사업회 이석형회장(산림조합중앙회장)은 안중근의사의 스승이자 배후는 보재 이상설 선생님이라고 하면서 일제 강점기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 사령관이 작성한 비밀 보고서가 최근 발견되었다고 본지와의 통화에서 밝혔다.

이번 추모식을 계기로 이상설선생과 안중근의사의 관계를 취재 보도한 동아일보 조연경기자의 양해를 얻어 역사적 진실을 밝혀본다.

日 비밀문서 “안중근 스승이자 배후는 이상설”
'일제 스파이의 대부' #아카시/ 비밀보고서 日-러시아서 발견

일제강점기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이 작성한 비밀 보고서는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오른쪽)의 배후를 캐면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왼쪽)과의 사상적 교류에 주목했다. 동아일보DB

일제강점기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이 작성한 비밀 보고서. 이 기밀 문건은 중국 하얼빈 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의 배후를 캐면서 독립운동가 이상설 선생과의 사상적 교류에 주목했다./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 제공

 

 

 

 

 

 

 

 

 
“가해자 안응칠(안중근 의사)은 3년 전(1906년) 당시 배일 목적의 교육에 종사하던 이상설을 찾아가 문하생이 됐다. …이상설은 안응칠이 가장 존숭(尊崇)하는 자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 의사(1879∼1910)와 헤이그 특사로 성명회 선언서를 주도했던 이상설 선생(1870∼1917)의 ‘사상적 연대’를 엿볼 수 있는 사료가 나왔다. 일제강점 초기 독립지사 탄압의 주범인 아카시 모토지로 헌병대사령관(1864∼1919)의 비밀보고서가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됐다.

이상설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석형)는 19일 “근대사다큐멘터리 제작사 ‘더채널’의 김광만 PD와 함께 일본 외무성 공문서관과 러시아 극동문서보관소 하바롭스크 도서관에 잠자고 있던 ‘한국주차군 참모장 아카시 모토지로 보고’를 찾았다”고 밝혔다.

이 기밀문서는 안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이토를 사살하고 체포된 뒤 ‘일제 스파이의 대부’로 불리던 아카시가 작성했다. 현대로 치면 중장급 참모장이던 그가 직접 중국으로 건너가 밀정들을 진두지휘해 만든 보고서다. 일제가 안 의사의 배후세력을 찾기 위한 사전 작업 성격이었다.

50여 일 동안 당시 여러 독립지사를 조사한 이 보고서는 안 의사와 이 선생의 관계에 집중했다. 특히 안 의사가 이 선생에게 정치적 사상적 감화를 받았음을 보여주는 대목이 많이 등장한다. ‘안응칠은 이상설에 의탁해서 당시 미국에서 귀국한 안창호와도 합의해 간도에 갔다.’ ‘(유럽에 머물던) 이상설을 안응칠과 동지들이 모금해 연해주로 불러들였고…안응칠은 간도에서 이상설을 사사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안 의사가 1906년 8월 고향을 떠나 간도 룽징에 망명한 것은 이 선생의 문하생이 되기 위해서였다. 당시 이 선생은 간도에서 서전학교를 설립해 운영하고 있었다. 1907년 고종황제의 명을 받아 헤이그 특사로 갔던 이상설을 모셔오기 위한 모금운동도 안 의사가 주도했다.

이런 사실은 그간 안개에 가려져 있던 안 의사의 사상적 기반에 대한 흥미로운 해석을 제공한다. 안 의사는 체포된 뒤 일제 법정에서 논리와 강단을 갖춘 언변을 자랑했다.
옥중에서 ‘동양평화론’과 ‘안응칠 역사’를 집필했다. 
하지만 유년기에 사서삼경과 신문, 가톨릭교양서를 수학했다는 것 외엔 크게 알려진 게 없었다. 김 PD는 “안 의사가 천명한 ‘동양평화론’의 뿌리가 당대의 지성으로 꼽히던 이상설 선생과 닿아 있음을 시사한다”고 설명했다.

보고서 말미에는 ‘조선통감부 촉탁경시 사카이의 신문’에서 안 의사가 이 선생을 언급하는 대목이 나온다. “포부가 매우 크며 세계 대세에 통해 동양의 시국을 간파하고 있다.
만인이 모여도 상설에는 미치지 못한다. 용량이 크고 사리에 통하는 대인물로서 대신(大臣)의 그릇이 됨을 잃지 않았다.” 옥중에서 모진 시련을 겪으면서도 안 의사는 항일투쟁의 사상적 스승에게 맑고 곧은 찬사를 바쳤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