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장흥의 대표적 별호는 ‘관산(冠山)’이었다.
여타 별호로는 ‘오차, 오아, 수녕, 정안, 정주, 회주’ 등이 있다.
‘관산’은 ‘보성- 산양, 영암 ?낭주, 진도-옥주’처럼 장흥의 별호이다.
원래는 ‘천관산’에서 유래했던 것이지만, 나중에 그 사정이 달라졌다.
고을 치소가 현재의 장흥읍으로 이전하면서 전체 장흥의 별칭으로 확대된 것.
예를 들어 보자.

‘추강 남효온(1454~1492)’의 <장흥우음>등 시문에 나오는 ‘관산’도 그렇다. 그 때의 ‘관산객관(冠山客館)’은 장흥(읍) 부사 치소의 객사시설을 가리킨다.

“관산(冠山) 수려해도 내 고향 아니다.”라 말할 때, ‘관산’은 장흥을 지칭한다.
‘영천 신잠(1491~1554)’이 쓴 <관산록(冠山錄)>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 <관산록>은 ‘장흥(읍) 지역’을 중심으로 한 유배기록으로, 그 거처가 ‘장흥읍 예양강변 동화모옥’임을 그 시문 내용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현재의 ‘관산읍(옛 고읍면)’에 좁게 한정한 체류기록이 전혀 아닌 것이다.
기봉 백광홍(1522~1556)’의 영천 선생에 관한 회고시에서도 마찬가지이다.

“관산구거(冠山舊居) 석재관산(昔在冠山)”이라고 회상할 때, 그 ‘관산’은 현재의 관산읍이 아니고. 현재의 장흥읍 치소에 해당한다.

‘기봉’은 또한 ‘진사 위곤’에 관련하여 “그 집은 ‘고읍 방촌’에 있다.”고 했을 뿐, ‘관산’ 지명을 거명하지는 아니했다.

‘농암 김창협(1651~1708)’이 그 위패제문에서 “관산지측(冠山之側) 연곡서원”이라 할 때, 그 서원이 위치한 ‘관산’은 전체 장흥 지역에 해당함은 물론이다.

‘존재 위백규(1727~1798)’ 선생이 “진천북주, 관산남주.”라고 대비할 때, 그 ‘남주 관산(南州 冠山)’은 전체 장흥의 별호가 되는 것이다.

장흥 출신 연고로 ‘임씨, 마씨’들이 받은 ‘봉호 관산군(冠山君)’도 전체 장흥별호에 해당한다.
반면에 현재의 ‘관산邑(관산面)’의 ‘관산’은 1932년에야 그 분리된 호칭으로 처음 등장하였다. 그러니 이제는 구별해야 한다.

‘넓은 의미, 장흥의 별호 관산’과 ‘좁은 의미, 현재의 관산읍’을 따로 분별하여야 할 일이다.
옛 문헌에 등장하는 ‘관산’을 마주치면, 곧바로 ‘현재의 관산읍, 천관산 지역’으로 좁게 한정하는 일부 병폐가 엿보여 따로 정리해 보았다.

우리 장흥 사람들은 예전에 ‘장흥인, 관산인’이었던 것이다.
 

저작권자 © 장흥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