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도청 신재춘 중소기업과장이 명예퇴직(3급 부이사관)을 했다. 신과장은 장흥 장평출신의 향우로 도청의 요직을 두루 거친 행정통으로 명예퇴직 후에는 고향 발전을 위하여 지역민과 함께 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평생 몸 담았던 공직을 명예퇴직하는 소회?
▶신재춘과장=엊그제 공직에 발을 입문한 것 같은데 벌써 물러서야 할 만큼 세월이 흘렀습니다.
30여년 공직에 몸 담았으니까 짧은 세월은 아닙니다. 그동안 대과(大過)없이 공직생활을 마감하게 되기까지는 제 뒤에서 묵묵히 저를 믿고 따라준 아내를 비롯한 가족들의 말없는 희생이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감사할 일입니다.

저는 공직생활을 하는 동안 지연·혈연·학연이라는 말로 표현되는 소위 빽이 없었습니다. 오직 열심히 일하는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것이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빽이었습니다.
항상 깨어있는 공직자이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런데도 돌이켜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좀 더 멀리 내다보고 일을 더 잘할 수 있었는데...  하는 아쉬움이 앞섭니다.

“장강(長江)의 뒷물이 앞물을 민다”는 중국 속담이 있습니다. 새로운 세대가 기존세대를 밀치고 주역으로 등장한다는 의미입니다. 저는 정년퇴직까지 더 근무하는 것도 좋지만 저처럼 떠나갈 때를 알고 다소 아쉽다고 느낄 때 떠나는 것도 아름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공직자로서 몇 가지 자부심은 있습니다. 우선 ‘청렴’했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부모형제 가족들, 나를 키워준 고향에 부끄럽지 않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어느 것이 바른 길인지 고민하고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합니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하면 더 편할 수 있었겠지만 그 길을 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명예퇴직을 하는 이유?
▶신재춘과장=공직자라면 모두 정년퇴직을 꿈 꾼다고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저는 정년퇴직을 하지 않고 명예퇴직을 선택했습니다.
정년퇴직에 대한 미련이 없지는 않았습니다. 혹자는 요즘처럼 직장잡기도 힘든데 왜 신(神)의 직장을 그만 두느냐고 묻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제가 가야 할 또 다른 길이 있기 때문입니다. 내 손을 펴서 내 손에 쥐고 있는 것을 놓지 않고는 새로운 것을 잡을 수 없는 것이 세상의 이치(理致)입니다.
깨끗하고 넓은 들, 풍족한 바다, 청정한 산을 고루 갖춘 살기좋은 곳이 장흥입니다. 아쉽게도 최근 장흥은 인근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습니다. 여우도 죽을 때는 제가 살았던 굴 쪽으로 머리를 향하고 죽는다고 합니다. 저는 평생 행정을 수행한 공직자로 살면서 정책을 수립하고, 일선 시군이 집행하도록 하는 일, 일선 시군과 중앙정부를 연결하는 중간자 역할을 해 왔습니다.

평생 공직에서 익힌 노하우를 고향을 위해 봉사하는 것도 의미있고 값진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고향에서 지역일에 지역민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울고 웃는 것도 가치있는 일입니다.
너 아니라도 할 수 있다고 말 할 수도 있습니다. 옛말에‘자리가  사람 만든다’는 말도 있습니다. 누구든지 그 자리에 앉으면 다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틀린 말입니다. 과거의 단순한 행정에서는 가능한 말이지만 오늘날 전문화되고 복잡해진 현재는 의욕만 가지고 할 수 없는 것이 행정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국정을 잘 할 수 있음에도 탄핵받고 싶어서 일부러 못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잘하고 싶었지만 몰라서 탄핵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동안 거쳐 온 주요 보직(補職)과 기억에 남을 만한 업적은?
▶신재춘과장=30여년의 공직생활 대부분을 전남도청에서 일 했습니다. 도청에서 주요 보직은 민선 1기와 2기 도지사를 역임한 허경만 도지사의 비서(6년), 법무관실 행정심판업무, 전남도청 인사계장, 감사계장, 회계감사계장, 공직감찰계장, 세정계장을 거쳤고, 규제개혁추진단장, 중소기업과장을 마지막으로 부이사관(3급)으로 명예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공직내내 일복은 타고 난 것 같습니다. 법무관실 재직시에는 전국 최초로 학교급식조례를 제정했습니다.
지금은 학교급식 지원이 당연한 일이 되었지만 당시에는 우리 도가 제정한 학교급식조례가 대법원에 제소될 만큼 중앙정부와 첨예하게 대립하였고 전국적인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결국은 국무총리의 조정으로 우리 도의 학교급식조례가 채택되어 전국으로 파급되었습니다.
인사계장 때에는 전국 최초로 공무원들의 승진후보자순위를 공개했습니다. 말이라서 쉽지 인사권자인 높은 사람들의 반대가 심했습니다.
그래도 청렴하게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이 덕분에 당시 전남도청의 인사청렴도는 전국 최고를 유지했습니다.

인사계장과 감사계장, 공직감찰계장 재직시에는 투명하고 공정한 인사와 확실한 신상필벌(信賞必罰), 중소기업과장 재직시에는 전통시장 살리기, 청년 창업 지원 및 청년상인 육성, 기술력이 있는 청년들의 기업활동을 돕기위한 청년펀드 조성, 이낙연 도지사와 함께 추진한 서민 금융복지시책 추진, 서민 빚 탕감, 자영업자 지원 시책 등을 추진해서 지금 문재인 정부의 정책수립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합니다.
지금 이런 우리 도의 시책들이 중앙부처 정책으로 채택되었고, 전국이 우리 도를 벤치마킹하고 있는 일들이 의미있는 일들로 기억됩니다. 

-현재 장흥의 문제점은?
▶신재춘과장=한마디로‘시계(視界) 제로(zero)’입니다. 장흥발전을 이끌어 가야 할 지역주민과 공직자그룹의 의사소통이 부족하여 붙통(不通)입니다. ‘불통즉통 통즉불통’(不通則痛 通則不痛 : 통하지 않으면 아프고, 통하면 아프지 않다)이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장흥 미래에 대한 지역민과의 공감(共感)이 부족합니다. 될 성 싶은 가정은 초가삼간을 짓더라도 가족들끼리 큰방은 여기에, 부엌은 이렇게 들이자며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나눕니다.
지금 장흥은 앞으로 10년 후, 20년 후의 장흥 모습을 말할 수 있는 주민은 많지 않습니다.
요즘 행정은 협치(協治)를 가장 중요시 합니다. 지역의 미래를 결정하는 크고 작은 정책결정에 행정기관과 지역민이 머리를 맞대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도 중요한 일입니다.
장흥의 밝은 미래를 위해서는 앞으로 더욱 소통이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가족 관계, 주요 학력, 생활신념은?
▶신재춘과장=장흥 장평 용강(탑동마을)이 고향입니다. 장평초등학교와 장흥장평중, 광주진흥고, 부산동아대(영문학과), 전남대학교 정책대학원을 나왔습니다. 형제간은 3남 1녀중 장남입니다.
가족관계는 아내(홍미랑)와의 사이에 자녀는 1남 2녀를 두었습니다. 아내와는 대학시절 만나 연애결혼을 했습니다.

가슴에 평생 담고 살아 온 단어들이 있습니다. “정의로운가?, 깨어 있는가?, 청렴, 열정, 의리”입니다. 이 말들은 공직자로서의 제 언행과 연결되어 있어서 제가 항상 바르게 걷도록 길잡이 역할을 해 주었습니다. 덕분에 좀 더 부끄럽지 않게, 손락질 받지 않는 공직생활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계영”(戒盈. 분에 넘치는 것을 경계한다)과 “꿈꾸는 사람이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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