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려가는 길에야 설레는 가슴이었지만, 정작 고향에 다달아도 고향이 없을 때가 있다. 이번 추석 연휴 중에 장흥읍 건산, ‘모정등(모종둑)’을 찾았을 때 그랬다, 어느 쪽으로도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없었고, 그저 무심한 숲만 무성하였다. 이하, 지난 시절을 회상하며, 그 주변 마을지명을 정리하여 본다,

▲건산(巾山)
<장흥읍지 정묘지>에 ‘건산’이 나오지만, 1521년경에 장흥 땅에 유배와 17년을 살다간, ‘영천 신잠(1491~1554)’의 <관산록>에도 등장한다.
그때 인물, ‘건산처사, 생원 양억주’가 거처하고 있었다. 그 ‘건산’ 유래에 대해 “억불산 며느리바위의 탕건이 떨어진 곳. 장흥 건산마을 특산물 모시(巾) 때문에 그랬다”고도 한다.
필자 의견으로는 ‘큰 산’ 음가(音價)에서 유래한 ‘건산’으로 여겨진다. ‘건모라(신라), 건길지(백제), 건지산’에서 짐작되는 ‘크다’는 ‘건(큰)’이다. 결코 높고 크지 아니한 산이지만 역사문화적 연고에 있어 ‘크다’는 사연이 숨어 있을 것 같다. ‘건(巾)’은 제례 상징이기도 하다. 제사를 지낸 곳일 수 있다. ‘두건, 치마, 허리띠, 옥대’와도 통한다. 그 ‘건산’ 뒤편으로 원래의 장흥부(府) 치소, ‘중녕산성(황보城)’이 들어섰다. 장흥읍성이 지금의 경찰서 법원 쪽으로 옮겨가기 전에는 그곳에 있었다. ‘모정등(모종둑)’ 정상에 올라서면 장흥사방 벌판이 한 눈에 들어온다. 활을 쏘는 ‘사정(射亭)’도 ‘건산’에 있었다.

▲가시미.
<정묘지>에 ‘병천(幷泉)’이 나온다, 여산 송씨 ‘송오 유기(遺基)석축’이 ‘건산後 병천’에 남아있다는데, 현재는 찾을 길 없다. ‘쌍샘’이 있었다니, ‘병천(?泉)’에 부합하기도 한다. ‘모산 가에 위치한 갓샘(갓샘이,가시미,곁샘)’도 된다. 한편으론 ‘가시(왕, 거세)가 있는 왕산’이란 뜻이 될지도 모른다. 오랜 샘은 그 지역유래가 깊은 곳임을 알려준다.

▲향양(向陽)
그 가시미 옆마을이다. ‘생양(生陽)’이라고 했다 ‘생’을 길게 빼면 ‘시양’이다. ‘시양쟁이’라고도 했다, 이때 ‘-쟁이’는 “<자이<잣”으로 ‘고개, 성(城)’을 뜻한다. 마침 ‘시양쟁이’ 뒤편에 ‘중녕산성’이 있다. ‘생양사(生陽寺)’도 있었다. 그 말 그대로, ‘태양(陽/해)을 뜻하는 큰 인물’이 태어났던 곳은 아닐까? ‘향양’ 건너편에 있는 ‘월평(월락평)’은 ‘달이 떨어진 명당’이 아니라, ‘우리말 다락들’을 ‘한자말 月落坪’으로 옮긴 것뿐이다. 사자산 제암산 아래로 펼쳐진 예전 ‘월평들’은 그 지대표고가 훨 높았다.

▲모산(茅山)
‘건산’에서 ‘우목리(개칭 우산리)’와 안양 쪽으로 나가는 삼거리를 ‘모산 삼거리’라 했다. 지금은 크게 변했다. ‘모산’ 지명은 전국적으로 꽤 있는데, 우리 용산면에도 ‘모산’이 있다. 대개는 ‘못 안’이 ‘모산’으로 연음된 것으로 본다. 예전에 그 주변에 ‘큰 못’이 있었다는 것. ‘못’이 있는 곳은 대체적으로 방축이 있고, 옛 창고 관아가 있는 ‘둠(담)’지역이기도 했다.

‘장흥읍 모정등(모종둑)’ 아래, 여중학교 뒤편에 마침 ‘못골‘이 있다.(‘목골’이 아닌, ‘연곡(淵谷)’이다.)
장흥 원도리 방죽, ‘미나리’도 그런 못물에서 자란다. ‘미나리’의 ’미‘는 물을 뜻한다. 벽사역 앞쪽 마을 원두(院頭) 마을은 그만 ‘원도리’로 바뀌어졌다. 그 벽사역 뒷편 위로 ‘상리’가 있다. 그 ‘벽사역(축내리,중리), 상리’ 지역과 중녕산성 사이는 대체적으로 저지대였다. 삼한, 삼국, 고려시대 등 그 경지정리가 안 되던 시절에는 아마 늪지 정도 아니었을까? 지금의 ‘예양강 십리장제(十里長堤)’가 성축되기 전에 장흥읍 강동(江東)은 잦은 홍수피해로 침수상태가 일상적이었을 것.

이제 ‘모정등(모종둑)’ 이야기를 해보자.
먼저, ‘모정등(茅亭嶝)’이다.
이 경우는 “모정(茅亭)이 있는 산등성이”로 여긴다.
아마 조선후기로 짐작되는 무렵부터 휴식터로서 ‘모정(茅亭)’은 있었을 것.
필자 조부님의 漢詩도 거기 ‘모정(茅亭)’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아주 오랜 옛날에는 ‘모산(茅山)’이 있었을 뿐 ‘모정’이 먼저 있었을 턱은 없다.
여기에서 ‘모산 모정’의 ‘모’는 어디에서 유래한 것일까?
“띠 茅”를 먼저 들지만, “모자(투구, 사모)帽, 성씨 牟,毛”도 있다. 현재는 보성 쪽 도로로 그 중간 허리가 잘렸는데, 어쨌거나 그런 ‘건산’을 두고 ‘모자, 투구, 사모’ 모습으로 보았을 수도 있겠다. 어떤 훌륭한 ‘모씨 인물’이 있어 ‘모산’으로 불렀을지도 모른다.

다음, ‘모종둑’ 명칭이다.
이 경우는 “모산 산마루(宗) 둑”으로 받아들인다. 충청도 온양에 그런 ‘모종동’이 있다.
장흥읍에서 성장한 필자 어린 시절에는 ‘모종둑’으로 불렀다. 그래서 “山을 두고 웬 ‘둑’으로 부를까”라는 의문을 가졌었다. 문제는 ‘둑’ 부분인데, 그 ‘둑’ 유래에 대해 나름 그 설명이 가능하다. 앞서 말한 대로, 그 ‘모산’ 주위에 ‘물가 못’이 있기에 그보다는 ‘높은 둑’ 고지대를 지칭할 수 있겠다. 또 ‘깃발 둑(둑,纛)’도 있다. 아주 오랜 옛날에 장흥읍 요처 마루(宗)되는 ‘모종산 정상’에 어떤 장군이나 큰 인물이 머무는 표지 깃발을 꼽았을지도 모른다. (한편, ‘강진 병영’이 임란 직후 ‘장흥 병영’으로 옮겨온 시절도 있는데, 병영에는 ‘병영 둑제’ 행사도 있다.) 또 ‘큰 덕(德)’이 ‘둑’으로, ‘산꼭대기’의 ‘대기, 댁’이 ‘둑’으로 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필자 내심에는 여전히 큰 의문이 남아있다.

인근 ‘나주, 해남, 강진, 영암, 고흥’에는 ‘진(辰)국, 마한, 백제’ 시절로 추정되는 대형 고분도 나온다는데, 왜 우리 장흥에는 그런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가? 상상의 나래를 펼쳐본다, 장흥 ‘모산 모종둑’에 혹 그런 고분은 없을까? 아니, 그 ‘모종둑’ 자체가 그런 큰 고분, ‘큰 무덤 둑’은 아닐까?
마무리한다. ‘모정등(모종둑)’ 그 고목나무도 진즉 없어졌고, 그 시절은 이제 멀리 흘러가버리고 말았다. 그곳에서 연을 날리고, 비탈길에서 미끄럼을 탔다.

어떤 이는 학교수업을 빼먹고 불장난을 했다. 어떤 이는 축구를, 웅변을, 주먹질을, 데이트를 하고, 어떤 이는 노래를, 트럼펫을 불렀다. 이 지면을 빌려, 장흥 ‘모산, 모정등, 중녕산성’ 성터를 감아 도는 ‘둘레길’ 개설을 제안한다.

<부기> 1), 동학혁명 때 ‘모정등’을 점령한 동학군은 현재의 장흥읍성 공격을 하고자 그 시절 ‘예양강’을 건너갔었다. 현재의 ‘탐진강’ 명칭은 일제당국이 나중에 붙인 것에 불과하다.
2), 필자 기억으로는, 장흥여중 뒤편 ‘못골’ 쪽에서 ‘모정등’을 오르는 경우 ‘깊게 패인 지역’을 건너고서 올라갈 수 있었는데, 혹 ‘해자’ 흔적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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