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지산 숲에 봄이 꿈틀거린다.
누런 풀밭에 함초롬히 꽃대를 끌어올린 난초가 만삭의 몸으로 산을 지키고 있다. 얼음장을 뚫고 나온 복수초는 서릿발이 부풀어 오른 곳에서 영원한 행복을 일러주며 노랗게 물들이고 있고, 메말랐던 계곡에는 물방울이 한 방울씩 맺히는 걸 보니, 대지는 이미 봄볕에 녹아내리고 있음을 느낀다.

등을 밀던 바람이 앞서서 산모퉁이를 휘돈다. 계곡물 소리가 조용히 겨울을 밀어내며 내려가는 걸 보니 할미꽃을 마중하는 걸까.
자박거리며 화중연화火中蓮花 속에 든 보림사로 간다.
앞산 숲에는 비자림이 더더욱 푸르고, 마삭줄은 겨울이 힘들었는지 피멍 든 모습으로 어린나무를 옥죄고 있다. 지난 늦가을 고구마를 캔 산밭에는 늙은농부가 뿌려놓은 거름더미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걸 보니, 아침부터 갈퀴 발처럼 헝클어진 억센 손으로 봄을 헤집고 있었던 모양이다.

구산선문 가지산파 보림사.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가지산 남쪽, 봉황이 날아드는 둥지에 천삼백여 년(759년) 전 원표대덕이 터를 잡고, 보조국사 체징이 신라 헌안왕의 뜻을 받아 구산선문 중 최초로 가지산파를 이루었던 곳. 체징선사를 도와 보림사 중창에 몸을 던진 부설거사의 부인 묘화보살의 구구절절한 전설과 마디마디에 묻힌 고난苦難한 역사가 겨울이 녹으면서 봄이 되고, 어제가 전설이 되어가듯 산사는 곰살스럽게 늙어가고 있다.

산모퉁이를 지날 때 힘 빠진 겨울바람과 잿빛 햇살을 만나 한참을 서서 날 선 봄을 맞이하고 있다. 먹구름 비켜난 햇살과 맑은 바람도 내 것이고, 계곡물을 달구는 저 빛도 내 것으로 담아 오래전 다녀간 퇴색된 기억을 떠올리며 일주문을 넘어간다. 사천왕은 사바세계의 삿됨을 두 눈을 부릅뜨고 천 년을 변함없이 중생을 위해 수호하고 있다.

대웅전 처마 끝 그림자가 선을 긋는다. 법계와 속계를 가르는 걸까. 햇살은 대웅전 뜰 앞에 내려앉아 위대함에 적요하고, 법당에는 간절한 가피를 바라는 처절함만이 간간히 어간문 사이를 비집고 나온다.
삐그덕, 힘주어 당긴 법당 문소리가 세상을 깨운다. 하나의 등불이 능히 천 년의 어둠을 없애고 하나의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앨 수 있다는 육조 혜능선사의 법보단경소리가 법당을 밝혀 정갈하다. 덧없는 부끄러움과 낯선 진실들을 짊어지고 오래된 길을 따라와 지혜의 꽃불을 밝혀온 법당에서 흩어진 영혼과 돌담처럼 쌓인 욕심에 고개 숙인다.

붙들고 싶은 기억은 초라하게 꺽 이고, 숨 막힐 것 같은 간절한 바람만이 쏟아진다. 부족함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가지고 있는 것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잊고, 밝혀둔 촛불이 나를 위해 밝혀주기를 바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욕심이다. 내려놓을 것이 없을 것 같은 가난한 삶이 한쪽으로 쏠리는걸 보면 아직도 가지고 있는 것이 많은 걸까. 오늘도 빈 마음으로 산사를 더듬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어슬렁거리는 겨울바람에 깊게 팬 삶의 옹이가 더더욱 시려 올 것 같다.

담장에 기댄 매화는 어젯밤 밝은 달을 품고 가지 끝을 곧추세워 금방이라도 몸을 풀 것 같고, 빛바랜 낮달이 숲을 기웃거리자 봄을 기다리는 가지산 원표 차 향이 스멀거린다.
경내를 어슬렁거리던 발걸음이 대적광전으로 향하고 있다.

신라(870년)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으로 세워진 국보 제44호인 삼 층 석탑 앞에서 발걸음을 멈춰 부처의 빛이 사방에 비추길 바라는 석등과 석탑을 돌아, 대적광전 철조비로자나 법신불 앞에 삼배를 올린다. 진리가 태양의 빛처럼 우주에 가득 비추길 간절하다.
벽면에 붙은 매화보살이라는 글귀와 함께 한 장의 사진을 눈에 담는다. 매화보살은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일까. 변산 월명암에서 만났던 스님의 이야기는 “원래 부설거사 부인인 묘화보살이 구전으로 전해지면서 매화보살로 변한 것 같다”며 안타까워하시던 모습을 기억하며 가지런한 돌담장 밑으로 봄볕이 게으르게 빠져나가는 길을 따라 내려오자 대웅전 처마 끝에 걸린 풍경하나가 곱디고운 소리로 배웅한다. 땡그랑 ∼ 땡그랑

더디게 다가오는 봄날을 기다리지 말고 봄을 맞으러 나와 보시라.
기억 속에 흩어진 보림사로 가는 명상의 길을 걸어보시라. 걸으며 빠름이 숨 가쁘거든 허물어진 언덕에 기대어 소소한 풍경과 자연의 소리를 듣고, 보림사에 들어와 만삭이 된 매화 나뭇가지 위에 앉아있는 해맑은 햇살의 침묵 앞에서 지친 일상을 위로 받으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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