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물 소리마저 자지러졌다. 계곡물이 서늘한 바람에 힘을 잃고 가을을 타고 있다. 싱그러움이 사그라진 풀꽃하나가 밤별을 우러르다 고개 숙인 풀밭 너머에 가을을 훔치고 마중 나온 달맞이꽃 앞에서 억불산 자드락길은 시작된다. 발바닥에서 바스락대는 낙엽 소리가 정겹다. 여름이 빠져나간 숲에는 시월의 햇살이 초록 물 베인 나뭇잎에 알록달록한 고운얼룩을 찍고자 숲에 내려와 있고, 길 건너에는 늙은 밤나무가 알밤하나를 길가에 ‘툭’하고 뱉어내자, 알밤들은 밤하늘에 돋아나는 별처럼 여기저기에다 ‘투두둑 툭툭’ 뱉어낸다.
지난여름 폭염에 시달린 늙은 밤나무는 힘에 부치는지 가지하나를 푸른 나무에 슬쩍 기대어 꾸벅거리고, 올망졸망한 동백나무와 단풍나무는 아침 안개에 곱게 씻고나와 뭉개고 지나가는 가을바람에 뒤척인다.
바람의 온도가 낮아질수록 여름 그늘도 사그라지고, 누런 들판의 벼들도 차분해 지고 있지만, 조선낫 한 자루를 들고 논둑을 어슬렁거리는 노인은 이 무렵이면 가을비가 내릴 것 이라는 것을 알고나 있는 듯, 속만 타들어 간다.

숲은 팔랑거리는 나뭇잎 소리, 풀벌레 소리, 산을 닮은 풀꽃의 미소, 누렇게 말라가는 낙엽냄새와 흙냄새로 뒤틀렸던 영혼이 곱게 펴지며 알 듯 모를 듯 한 엷은 미소가 사르르 번진다.
길을 가로지르는 청솔모 한 마리가 쏜살같이 나무를 타고 오르고, 독사 한 마리가 머리를 처 들고 길을 가로 저어 가고, 산새들은 ‘푸드득’ ‘푸드득’ 옮겨가며 영역을 경계하는지, 다 키운 새끼들을 보호 하는지 적요 속에 파묻힌 숲을 깨운다.

하늘에 뜬 새털구름이 숨 속에 들어와 흰색으로 물들이고 숲으로 들어가니 둥지를 떠날 채비를 서두르는 산새 몇 마리가 쪼개진 가을햇살을 쪼이며 깃털을 고르고 있다.
조금은 낯설어도 두렵지 않는 숲. 때까치 둥지와 하늘다람쥐 둥지가 나뭇가지 끝에서 보이는걸 보니 산은 가을앓이가 시작된 듯하다. 이미 겨울 채비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뱁새(오목눈이새)는 강한모성으로 뻐꾸기새끼를 키워냈는지 몸이 바짝 마른 채 잡풀더미 속으로 파고든다.
허허로움에 흔들리는 단풍나무를 지나 가파른 돌부리 길을 오른다. 목을 채우는 거칠어진 호흡으로 더렵혀진 삶의 찌꺼기를 뱉어낸다. 일상 속에 담아둔 욕심과 집착을 해맑은 솔바람에 씻기고 자지러지기를 기다린다.

오고 가는 사람들마다 헝클어진 마음을 정리하고 잰걸음으로 올라와 투명해진 산바람을 마시며 몸 안에 묻은 소소한 감정을 털어내고, 기억에서 사라진 행복을 더듬고 있을 것이리라.
가을 잠자리가 꽃 진 자리에 돋아난 씨앗들을 흔들자 꽃 물든 바람이 숲을 타고 낮게 흐르며 나뭇잎에 꽃물을 뿌리고 지나간다. 붉은 상사화, 자주색 벌개미취, 노란 산국 한 송이, 하얀 구절초, 그리고 먼발치 숲에서 풍겨오는 생솔가지 냄새를 맡으며 더러워진 삶의 한 조각이라도 내려놓지 못한다면 겨울 찬바람에 씻고 나온 말간 별 하나를 보기가 부끄러울 것 같다.

자드락길을 지나가는 흰 구름이 참 좋다. 숲의 고요에 나를 내려놓고 있다. 산새소리 틈바구니에서 날선 잡풀들이 ‘스윽스윽’ 이울어 지며 땅으로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스럽다. 귀를 건드리는 외마디 소리에 마지못해 실눈을 뜨고 길 넘어 밤나무가지를 바라보니 가지 끝에 만삭이 된 밤송이가 몸을 풀고 뜨겁게 달궈진 속살을 헹구어 내고 있다. 밤 한 톨이 숲으로 숨는다.

청미래 줄기가 뒤척거리는 산중턱에서 신산辛酸한 삶을 고요 속으로 밀어 넣고 앞산을 바라본다. 예양강 물줄기가 풀등을 휘돌고 부드럽게 내려온다. 짠물 바람이 산발치에서 천수를 누리며 선산을 지키고 있는 등 굽은 소나무를 흔든다. ‘푸드덕 푸드덕’ 산새들도 덩달아 날아오르고 산 그림자는 낮달과 함께 박림소에 내려와 찬 서리 맞으며 월출산을 넘어올 기러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걸까?

삶의 묶은 때를 벗어내는 명징明澄한 자드락길 무덤가를 지나며 삶을 반추해 본다. 한 번도 또록또록 빛나보지 못한 삶. 채워지지 않고 유출되어버린 적은 만족, 버릴 줄 모르는 허망, 차오르는 분노, 내재된 갈등, 채움의 과욕으로 부터 성글게 빠져나가는 삶을 막기 위해서라도 소소한 것에 만족하고 행복해야 할 것 같다. 그렇지 않고서는 내 몫으로 정해진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흐르기 때문이다.

빛바랜 햇살이 숲을 덮고 있다. 머지않아 말간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숲은 고요 속에서 존재를 비워내며 봄을 기다릴 것이다. 이런 날, 넘치는 소유와 움켜진 모든 것을 차분히 정리하며 토라진 감정들을 툴툴 털어내어 지순한 마음이고 싶어지는 것은 비단 나만이 가지는 생각일까?

시월 마른바람이 불어오면 산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리움이 쑤셔오면 산으로 가야 할 것 같다. 그 무엇으로도 달랠 수 없는 앙금이 목을 타고 넘어오면 산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사는 것이 힘겨울 때 소스라진 억불산으로 가야 할 것 같다. 유선乳腺을 타고 흐르는 비릿한 약수 한 모금을 마시고, 내 어머니의 자궁 속으로 들어가는 탯줄을 걸으며 깊은 사유에 묻히고 싶다.

억불산 자드락길을 오를 때에는 적게 소유한자가 더 많은 행복을 누린다는 진리를 곱씹으며 올라와야 할 것 같다.
그래야 치열한 삶속에 피폐해진 마음이 조금이라도 치유되지 않을까? 혹여, 누군가에게 용서할 수 없는 마음이 있다면 억불산 너럭바위에 앉아 때 묻지 않는 하늘 한번 처다 보며 긴 숨으로 풀어내면 어떨까? 굽어지고 휘어지고 어그러진 삶을 붙들고 있다면 곰삭은 억불정億彿亭에서 남모르게 눈물한번 훔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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