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 중소기업인 최초 금탑산업훈장 수상도
끊임없는 경영혁신, 기술개발-철저한 기업가 정신으로 ‘오늘’ 일궈
8톤 트럭으로 시작해 당대 매출 1조 클럽의 기업가로 급 성장해

■대주중공업의 오늘은 철저한 기업가 정신으로

장흥출신의 자랑스런 중견 기업인 박주봉 대주·KC회장.

지난 1988년 단돈 200만원으로 회사를 설립했던 박주봉회장은 회사 설립 25년 만에 매출 1조원대의 중견기업을 육성시킨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받는 인물로 2001년 ‘자랑스러운 중소기업인상’을 수상한 데 이어 2010년에는 중소기업인 최초로 금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박주봉 회장이 지난 12월 4일, 대한상공회의소와 중앙일보가 공동 주최하고 산업통상자원부가 후원하는 ‘2014 기업혁신대상’에서 최우수 CEO상을 받았다. 박 주봉 회장은 '끊임없는 연구개발'과 '품질개선'을 통해 창조 경제와 신성장동력 발굴을 위한 전사적인 경영혁신을 추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대주·KC는 전체 근로자 30%가 50세 이상으로 중장년층 고용에 기여한 공로로 박 회장은 최근 고용창출 우수기업이자 장년고용 모범기업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바 있다.

지난 10월 13일, 박 회장은 서울 중구 대한상공회의소에서 열린 제7회 기업가정신주간 국제컨퍼런스에서 ‘일류 중견기업의 기업가정신’이라는 주제로 강연에 나선 바 있었다.
‘도전과 열정의 기업가정신’을 몸소 실천해온 기업가로 공인받아 온 박 회장은 이날 강연에서 어린 시절부터 사업가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고 밝혔다.

“학비를 스스로 벌면서 살았던 고등학생 때 우연히 부잣집인 친구네 놀러갔다. 밥과 귤을 실컷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아버지가 사업가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부터 사업가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국내 유일의 기초화학 분야 공기업인 한국종합화학이 민영화에 따라 매물로 나왔을 때 인수를 추진했다 …당시 노조가 5개월 동안 파업에 들어갔지만 수차례 설득해 노사가 하나 돼 생산성과 품질 향상에 주력할 수 있었다… 다만 공장을 가동한 지 8개월 만에 기술력이 상당히 앞선 일본 경쟁사와 비슷한 제품을 만들어내자 일본 업체들은 반덤핑 공세로 한국 시장을 초토화시켰다. 그리고 1년 동안 공장의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지만 손실을 감수하면서 꾸준히 연구개발을 시도한 끝에 유럽에서도 인정해줄 만한 제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이처럼 박 회장은 끊임없는 경영혁신과 기술개발로 그동안 수입에 의존하던 화학산업의 원천소재를 국산화하는데 성공, 무역수지 개선에 크게 기여한 중견 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운송업에 뛰어들다

“아버지 사업이 망했다. 이제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 한다.” 어머니의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귀를 의심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중학생이던 박주봉은 이날 이후 붕어빵 장사부터 평화시장 미싱사 시다(보조), 겨울엔 야외 스케이트장에서 어묵과 떡볶이도 팔았고 선배, 동료 집을 전전하다 잘 곳이 없을 때는 학교 교실에서 자고 먹기도 했다.
가까스로 고교, 대학을 졸업한 그는 전역 후 1년간 해운회사에 다니던 그는 무연탄 수입을 담당하는 지인에게 무연탄을 연탄공장에 날라다 주면 돈이 될 거란 말을 듣고 악착같이 모아 200만원으로 8t트럭 한 대를 산다. 회사도 그만 두고 운송업에 매달린 그에게 업무가 장난이 아니었다. 인천항에 무연탄을 실은 배가 들어오면 이를 가져가려는 트럭이 약 300대가 몰려든다. 남보다 일감을 많이 받으려면 빨리 줄을 서야 했다. 그는 새벽 4시 하역이면 2시부터 기사를 깨워 항구로 나갔다. 항상 1등으로 물량을 받았다.
“1등으로 받으면 이점이 많았습니다. 오전에 배송 한 번 갔다 온 후 다시 한 번 트럭에 물량을 실을 수 있으니까요. 점심도 5분 만에 후다닥 먹고 배송 갔다 온 뒤 오후 서너 시쯤 또다시 하역 물량을 받아 밤늦게까지 운송하고 돌아오곤 했습니다. 남들 한 번 할 때 전 3번 물량을 나른 셈입니다.”
그렇게 그는 밤낮없이 일했고, 그만큼 돈을 벌었다. 처음엔 기사 하나, 트럭 한 대였던 게 7년 만에 트럭 50대, 매출 500억원 까지 뛰어올랐다. 업종도 무연탄 운송 외에 철근 운송하는 카고트럭으로까지 넓혔다.
철근 운송은 무연탄처럼 물량 확보가 중요했다. 마침 회사 옆에 현대건설 철구조물 공장이 있어, 자기가 직접 철구조물 사업을 하면 운송 물량을 더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겠다 싶어 1988년 지금의 대주중공업 전신인 대주개발을 출범시킨다.

당시 88올림픽 전후라 전국 곳곳에 교량이며 아파트 공사 등 건축자재 수요가 많았다. 납기를 꼬박꼬박 지키는 데다 항상 누구보다 새벽부터 일을 나갔던 박 회장인지라 금세 철구조물 사업은 자리를 잡았다. 1년 만에 부산의 낙동대교 사업권도 따냈다. 이력이 쌓이자 전국 여기저기에서 대주개발을 찾았다. 1990년 당시 현대건설이 대전정부청사를 한창 짓고 있을 때 철근 운송부터 빌딩을 지지하는 철구조물로까지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한 그를 당시 故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정 회장은 사람을 시켜 박 회장의 평판을 들어 봤다. ‘협력업체 대표인데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공사 기간을 단축시키기 위해 열심히 일한다’는 말이 돌아왔다. 정 회장은 직접 손을 내밀더니 악수를 하고는 “이런 젊은이를 키워야 한다”며 치하했다.

이후 현대그룹과의 인연은 더욱 돈독해졌다. 정 회장이 199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면서 기회가 왔다. 지역 유세 때마다 주민들이 사회간접시설, 백화점, 아파트 등을 지어 달라고 하자 정 회장은 ‘알겠다’며 실제 사업을 벌이기 시작했다. 뭔가 보여줘야 했던 대통령 후보이자 대기업 회장이었기에 계열사들도 분주하게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바쁜 곳은 단연 현대건설이었다. 유세 기간 내에 눈에 보이는 공사를 해야 했다. 철구조물 사업 물량이 전국 곳곳에서 터져 나왔다. 대주개발은 정 회장의 치하 사건 이후 현대건설이 눈여겨 챙기는 협력업체가 됐다. 이때 적잖은 물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허투루 일하지 않았다. 워낙 단기간에 공사를 해야 했기에 밤에 야간 조명을 켜고 백화점, 아파트 철골구조물을 세우기도 했다. 납기를 단축하니 더욱 신뢰가 쌓였다.

사업에 재미가 붙으면서 신바람이 절로 났다. 하지만 태평성대는 오래가지 못했다.
1998년 IMF 외환위기가 직격탄이었다. 당시 매출액이 500억원, 영업이익은 약 20억~30억원 수준이었다. 그런데 단숨에 80억원의 어음이 휴지 조각이 됐다. 철근 H빔을 건설회사에 팔았는데 건설사가 망하니 어음이 부도난 것. 철구조물 공장 확장에 투자를 하고 있던 때라 회사 돈은 많지 않았다. 첫 적자는 이렇게 뼈아팠다.
다행히 지난 8년간 은행에 한 번도 연체가 없다 보니 신용도가 높았다. 은행에서도 트럭, 공장 등 자산이 튼튼하다고 봤다. 그래서 그 어려운 시기에 추가 대출로 겨우 적자를 메울 수 있었다. 대신 다시 허리끈을 졸라맸다.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구조조정은 없다. 대신 하루에 한 번씩만 더 짐을 나르자. 과적은 안 되지만 짐을 최대한 많이 싣도록 연구하자’며 독려했다. 직원들은 묵묵히 따라줬다. 박 회장 역시 하루에 잠은 2~3시간밖에 못 잤다. 마침 정부는 인위적인 경기 부양을 위해 도로, 교량 등에 투자를 늘리기 시작했다.
운송 효율이 높은 대주 쪽에 당연히 기회가 많아졌다. 외환위기 1년 만에 회사는 다시 흑자로 돌아설 수 있었다.

IMF 외환위기가 꼭 시련만 준 건 아니었다. 공기업 민영화 바람이 불면서 공기업들이 속속 시장에 매물로 나왔다. 기회다 싶었다.
“당시 누가 주문을 하면 물량을 갖다 주는 소위 ‘을’로만 살아온 게 지겨웠습니다. 내가 생산한 물량을 여기저기서 달라고 하는 ‘갑’이 한번 돼보고 싶더라고요.” 이런 논리에 맞는 회사가 마침 있었다. 1973년에 정부가 세운 한국종합화학이었다. 이 회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수산화알루미늄을 생산해 사실상 독점 판매해왔다. 보크사이트를 특별한 방법으로 제조한 백색 분말로 액정화면(LCD)·반도체 기판은 물론 비누, 치약 등 다양한 분야에서 기초 소재로 쓰인다. 그러다 보니 삼성, 현대 등 대기업이 앞다퉈 사 갔다. ‘이거다’ 싶었다. 주위에선 주력 업종과 달라 경영이 쉽지 않은 데다 만성 적자 기업이라 말렸다. 하지만 박 회장은 밀어붙여 2001년 인수를 성사시켰다.
인수하고 보니 회사 사정은 생각보다 심각했다. 노조 반대도 극심했다. ‘대기업을 을로 두던 회사인데 듣도 보도 못한 중소기업이 인수한다는데 자존심이 상한다, 경영능력이 있기나 한 거냐’ 등 원색적인 비난도 서슴지 않았다. 박 회장은 노조원들을 따라다니며 설득에 설득을 거듭했다. “꼭 보란 듯이 회생시켜서 인센티브도 많이 주고 대기업으로 키워내 회사 다니는 자부심을 느끼게 해주겠다”고 강조했다. 6개월 만에 노조는 파업을 풀었다. 박 회장은 사명을 KC로 바꾸고 일본 퇴직 기술자를 모셔 오는 등 대대적인 구조조정을 단행했다.

“정비 기간만 한 달이 걸리던 공정이 있었는데 어떻게 하면 단축시킬 수 있을지 고민했어요. 직접 삽을 들고 작업에 나서보니 답이 보였습니다. 작업 효율이 문제였습니다. 근무시간을 앞당기고 공정 과정을 세 단계에서 두 단계로 줄이는 등 혁신을 했더니 정확히 2년 만에 노조와의 약속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매년 200억원씩 적자를 내던 회사가 흑자로 전환하면서 인센티브를 줄 수 있게 됐던 겁니다.”

■일본업체 저가공세, 덤핑제소로 극복/세계 1위 제품 두세 개 보유 차기 목표

얼마 안 가 시련은 또 찾아왔다. 공기업 독점 시대가 끝나자 일본 수산화알루미늄 업체들이 앞다퉈 한국 시장에 저가로 치고 들어왔다. 가격경쟁력에서 이길 수가 없었다. 일본 업체들의 속내는 KC가 두 손 들고 나가면 다시 가격을 올려 국내 시장을 독과점하겠다는 전략이었다. 이대로 물러설 수 없었다. 해외 사례를 찾아봤더니 덤핑 판정이란 묘안이 있었다. 그럴 경우 높은 관세를 통해 국내 산업을 보호할 수 있었다. 그때부터 정부부처, 국회 등을 부지런히 찾아다니며 상황을 설명하고 일본 업체들을 정부에 반덤핑 혐의로 제소했다. 이러길 8개월여. 마침내 무역위원회에서는 ‘덤핑 사실이 인정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일본 업체들은 높은 관세에 결국 물러났다.

다시 회사는 안정을 되찾았다. 더불어 2004년엔 거꾸로 일본에 KC가 만든 수산화알루미늄을 수출할 정도로 기술력도 높였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박 회장은 계속 기술 개발에 투자해 2006년에는 불에 강한 난연 재료인 초미분 고백색 수산화알루미늄을 국산화시켰다.

수입 대체는 이뿐 아니다. 한국광물자원공사와 합작해 LCD, 반도체 기판 등에 사용되는 특수알루미나를 개발(2010년)했는가 하면 포스코와는 발광다이오드(LED), 반도체·전기차 등에 들어가는 고순도 알루미나까지 개발(2012년)했다. KC로 수출을 늘리고 국산화에 성공하면서 박 회장은 금탑산업훈장 수상자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다.

2010년 자동차 부품 회사 코레스 인수까지 성사시킨 박 회장은 2012년 마침내 꿈에 그리던 매출 1조 기업에 당당히 이름을 올릴 수 있게 됐다.
“팔순이 되신 중학교 시절 은사님을 지금도 찾아뵙고 있습니다. 그분이 당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반드시 어른이 되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셨는데 그 말씀을 듣고 희망과 열정을 버리지 않았던 게 오늘날 저를 있게 했습니다. 은사님도 당연히 뿌듯해하시고요. 취업 안 된다고 좌절한 젊은이들, 사업 실패로 고생하는 이들에게 위기 때 더 잘해야 한다고 조언하고 싶습니다. 그럴 때일수록 남들보다 조금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고 작은 일이라도 하다 보면 반드시 기회는 올 것입니다. 기업가 정신은 가능성을 가능으로 만들고 작은 경험을 큰 현실로 만드는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박 회장은 당대 매출 1조원은 이제 시작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는 “우리 회사 제품이 세계 3~4위 하는 게 서너 개 있는데 세계 1위 제품 두세 개를 만들 때까지 부지런히 정진할 것”이라고 말했다.
박 회장은 슬하에 1남 1녀가 있으며 아직 경영에는 참여하고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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