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철(시인 · 숭의여대문창과 교수)

<지난호에 이어서 계속>
이 채움을 시인은 향기로 노래한다. “비우고 비워야 채워지고/ 선하고 선해야 꽃처럼 빛나는/ 환한 우주별로 영원히 피어나는 그것/ 곧 향기이니// 나 오늘도 묵묵히 걸어간다/ 내 생의 종착역에서 피어날/ 이 우주에서 유일무이할/ 그 향기를 위해”(「향기2」)처럼 비움은 곧 내면의 삶에 대한 충일성을 지향한다. 칼 융은 “나는 선한 사람이 되기보다 온전한 사람이 되고 싶다”며 내적으로 전일성(全一性)을 추구했다. 김선욱 시인 역시 자신의 내적의 삶을 충만하게 만들고자 하는 열망을 보여준다.
이 열망이 타성과 안일함을 떨치게 하고 그를 꿈꾸게 만든다. 길 연작이나 빈번하게 나타나는 그리움이라는 어휘들은 모두 그의 내적 갈망과 관계가 있다. “내 가슴은 수많은 해를 삼키며/ 끝없이 태우고 비워내지만/ 다시 채워지는 건/ 아득한 그리움뿐”(「황혼의 바다에서」), “이승의 나의 생이 오지게 환해지는/ 한 날을 꿈꾸며”(「다시 꿈을」) 안주하고 길들여지는 삶에 대한 거부는 시인에겐 운명이다. 그러므로 시인은 준엄한 자기 시련을 위해 혹독한 여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나, 사막으로 가리라/두 무릎이 꺾어지도록 정처 없이 허허 모래 벌로 달려가리/몸뚱이 기氣가 소진하면 죽은 듯이 퍼질러 누워 작열하는 태양 빛 아래 몸뚱이 태우며 사자死者의 그림자가 다가올 때까지 햇빛과 달과 별들과 이야기 나누리/나, 낙타 타고 사막으로 달려가리//낙타 등에 올라타 낙타 가는 데로 낙타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달려가리/낙타가 쓰러지면 모래 벌에 몸뚱이 누이고 밤엔 하늘 가득 쏟아져 내리는 별들을 우러르다 아득한 잠 속에 빠져 북극성 오르는 꿈꾸리.” -「사막으로 가리라」부분

내적 치열성을 놓지 않으려는 시인의 시정신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사막은 야성과 고독의 공간이다.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을 인내하지 않고는 통과할 수 없다. 사막을 내면에 들여놓고자 함은 그의 정신이 여전히 길 위에 있음을 보여준다. 편안 곳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시인의 의식은 청년과도 같다. 그러기에 세상이 요구하는 둥글게 살라는 처세술도 단호히 거부할 수 있는 것이다. “둥근 것도 당초 모서리 도드라진 곳이 닳고 닳아 이루어진다고/하여 둥근 것의 뿌리도 알고 보면 모난 것이라고”(「모난 것에 대하여」)한다. 모난 것이야말로 세상의 원동력이며 변화의 에너지로 보고 있다. 모난 것에 대한 역발상이 “모난 것이 정 맞는다”는 세상의 통설을 뒤엎고 있는 것이다.

김선욱의 시는 사랑과 열정의 노래이다. 그의 사랑과 열정은 뜨겁다 못해 타오르며 때로는 미쳐버린다.(‘미친다’라는 어휘가 시에서 유독 많이 나타나는 것을 볼 수 있음)「해바라기」, 「바다」, 「사랑에 미쳐야 하리」,「미친 사랑도 있다고 하니」,「고슴도치의 사랑법」,「며느리밑씻개의 사랑」,「꽃의 사랑」으로 이어지는 광애 연작 시편들은 폭발할 듯한 열정을 보여준다. 사랑은 가장 원초적이고 순수한 에너지이다.
그러나 자본과 논리, 이성의 합리성으로만 세계를 바라보는 현대사회에서는 사랑마저도 원초적인 생명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성은 상품화되어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데 사용되거나, 폭력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영혼을 고양시키고 영성의 자양분으로써 사랑을 향유하지 못하기에 이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삶이 메마르고 지친다. 영혼들은 생기를 잃어버리고 우울하다. 김선욱의 시는 생명의 에너지로서 오염되지 사랑을 회복하고 있다. “쿵쾅거리는 심장 뛰는 소리로”, “온몸의 신경세포가 곤두서는 환희의 소리로”, “푸른 자유의 바람 소리”로, “영혼의 통음”( 「사랑, 그 마지막 소리」)으로 생의 충만성을 환기시킨다.

“사랑만을 위해 태어난다/ 사랑의 희열을 위해 산다/ 이성이니 윤리로 통제되는 사랑도/ 거칠고 이기적이며 서둘러 욕구를 채우는 / 사랑이 아니다 -(중략)-// 온 세상이 제 것인 양/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당당한 사랑이다/ 아니,/ 제 씨를 온 땅에 뿌리기 위해 태어났으므로/ 사랑만이 제 씨가 만들어지므로/ 오로지 사랑에만 목매는/ 미친 사랑을 한다” -「꽃의 사랑」 부분

사랑은 곧 생명이다. 이 둘을 분리하고 해체해서 사랑을 포장지로 사용하거나 관념의 틀에 가두거나 윤리나 권위로 왜곡하기 때문에 가장 자연스러운 본래의 사랑이 죽어버린 것이다. 김선욱 시인은 꽃으로부터 사랑의 생명을 되살리고 있다. 사랑은 우주만물의 에너지로써 풍요로움과 기쁨, 생명의 신비다. 우리의 내면에서 사랑의 진정한 힘과 아름다움을 회복하는 것은 곧 원초적인 생명력을 회복하는 것과 같다.

“봄날이 오면/ 푸른 보리 밭두렁 너머 간지러운 종달새 노랫소리가/가슴에 오래 묻어둔 추억들을 건져낼 것이다 / 푸른 바람은 살랑살랑 피우며 숨넘어갈 듯 달려와/ 가슴 깊이 잠든 그리움을 깨울 것이다 / 빗장 열린 하늘에서 쏟아지는 푸른 햇살도/ 오래 묶인 발목 끈을 풀어 어디로든 떠나게 할 것이다/ 코끝을 간지럽히며 흐드러지게 웃어대는 꽃의 요정들도/ 키득거리는 웃음소리로 가슴 속에서 사라져가는 / 사랑의 불씨를 피워낼 것이다 -(중략)-// 껍데기뿐인 내 몸뚱이는/ 자꾸 흔들거리며 푸른 바람을 피워내고 / 기진맥진하며 다 죽어가던 사랑이란 놈도/ 기어코 활활 타오를 것이다//아, 그날이 오면 / 나는 미치지 않으면 버텨내지 못할 것이다.” -「봄날이 두려운 이유」 부분

위 시를 읽으며 환청처럼 온갖 생명들이 부르는 환희의 합창소리를 듣는다. 생명들의 향연이 시작되고 꽃들은 저마다 환한 등불을 내거는 봄날, 김선욱 시인은 두려울 정도로 봄의 황홀한 생명력에서 떨림을 느끼고 있다. 그것은 유년시절 철쭉평원에서 분홍빛 바다를 보았던 시인의 가슴 속에 늙지 않는 만년 소년이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새봄이 영원히 청춘인 것처럼 말이다. 봄이 되면 시인은 소년이 되어 얼음이 풀리고 보슬보슬 부드러워지는 대지처럼, 봄바람의 숨결처럼 삼라만상에서 사무치듯 타오르는 분홍빛 바다를 다시 발견할 것이다. 영혼의 울림이 있었던 최초의 봄날, 최초의 그 자리에 설 것이다.
김선욱 시인에게 이 유년의 체험은 자연을 통해서 얻어진 비움과 사랑의 변주에서 비롯된 듯하다. 자연은 늘 비우면서 채운다. 그것이 인간이 자연에서 배우는 사랑이 아닐까.

김선욱 시인은 1952년 전남 장흥에서 태어났다.
1988년 계간《민족과 문학》 ‘제1회 민족과 문학 대상 작품 모집’에서 중편 ‘청상의 귀향’으로 당선,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2008년 12월《문예운동》겨울호 詩 신인추천(‘사랑의 환희’외 4편)에 의해 시인으로 데뷔했다.
전남 장흥군에서 ㈜장흥신문사 발행인(대표이사)을 거쳐 현재는 편집인으로 재직 중이다.
시집으로 이번에 펴낸 『지는 꽃이 아름답다』외에,『정남진 천년의 꿈을(문예운동사, 2009)』 『새로운 사랑의 시작을 위하여(문예운동사, 2009)』 『강은 그리움으로 흐른다(새로운사람들, 2012)』가 있고, 에세이집 『참사랑(미래문화사, 1982)』과 기행산문집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달린다(마동욱 공저, 한얼미디어, 2006)』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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