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전통 가무악전국제전’이 내년부터 개최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올해 16회째 개최된 가무악전국제전은 16회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리고 우리가 그동안 힘겹게 외쳐왔던‘남도국악의 뿌리’ ‘서편제 본향으로서 장흥’의 미미지와 그 정체성도 다시는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장흥군은 호남 서남부 권역에서 중심적인 부사고을이었다. 이러한 연유로 유림문화와 선비문화가 발달되었고, 이러한 역사·문화적 전통 위에서 호남의 어느 지역보다 문사들이나 국악의 명인들이 많이 배출되었던 문림의 고을이요, 예향의 고을이었다.

흔히 서편제의 창시자로 잘 알려진, 조선조 정조·순조 무렵 8명창 중의 한 사람이었던 박유전은 전북 순창 출신이었지만, 전주대사습에서 장원을 한 이후에 지금은 보성에 속해 있지만 당시는 장흥군에 속했던 옥암면 강산에서 소리활동을 하며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다. 당시 박유전 소리는 흥선 대원군을 감동시켰고, 장흥군 강산출신임을 안 대원군이 "너의 소리가 가히 제일강산이라 할 수 있구나"하고 칭송한 이후 박유전의 더늠가풍을 '강산제(江山制·岡山制)로 부르게 되었고, '강산제'는 서편제의 대칭으로 일컫게 되었던 것이다.

이후, 박유전은 강산에서 많은 제자들을 키워냈는데, 그의 여러 제자 중에 뛰어난 소리꾼으로 장흥군 안양면 신촌리 출신 정재근, 정재근과는 친척으로 정재근 창법을 이어받았던 정응민 등 이었다. 보통 나주출신으로 알려진 정재근은 실은 강산과 가까운 마을이었던 안양 신촌리출신으로 철종·고종 때 박유전 문하생으로 어전에 나가 소리하고 홍패를 받았던 소리의 명인이었다.
역시 안양면 출신으로 정재근 창법을 이어받았던 정응민은 현존하는 '강산제' 보유자였던 故 정권진의 아버지로, 어려서는 백부 정재근에게 판소리를 배우고, 19세 때는 당시 장흥군 회천면(현재 보성군 회천면) 도강리로 이사했고, 장흥군 옥암면(현 웅치면)에서 은거하면서 순수한 서편제의 맥인 '강산제'를 이으며 많은 문하생을 배출하였다. 특히 정응민 밑으로는 20,30명의 뛰어난 제자들이 몰려들어 소리공부를 하였다.
회천면이나 웅치면은 1914년 행정개편이 있기 이전은 장흥도호부에 속했다. 오랫동안 생활권이 장흥도호부에 속해 있었던 만큼 박유전 정재근 정응민으로 이어진 서편제의 판소리는 자연 장흥이 활동무대가 되었고, 그로 인해 장흥의 서편제로 맥을 이어나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서편제의 뿌리는 장흥이라고 줄기차게 외쳐왔던 것이다.
뒷날 일제 강점기에 판소리 등 국악이 창극단에 합류되면서 '소리'로서 기능을 잃고, 여러 소리의 가풍들이 합쳐지면서 정통성도 퇴색되지만, 한편으로 고향을 지키며 가풍을 이어온 정응민 계열의 서편제만큼은 그 순수성을 지켜 나올 수 있었고, 오늘날에는 그 소리가 바로 '강산제' 또는 '보성소리'로 자리매김 되며 소리의 정통성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정응민 계열의 서편제가 오늘날에는 '보성소리'로 그 전통을 이어 나오긴 했지만, 당시 박유전-정재근-정응민 시대의 서편제는 바로 '장흥의 판소리'였으며, 그런 연유로 서편제의 뿌리는 장흥이고, 장흥이 바로 서편제 원류라 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에 이른 것이다, 특히 이러한 장흥의 서편제는 당시 장흥지역에 판소리 활성화를 주도하며 장흥의 국악발전에도 적잖게 기여하게 되었다.
서편제의 고을이었던 장흥 도호부에는 서편제 외에도 장흥읍 남산공원에 자리한 신청(神廳)이라는 국악연구소 겸 공연 무대가 있어, 호남의 남도 국악발전을 주도했다. 이 신청에서는 신채효 족제 신평재·신흥재 형제를 비롯하여 주화봉 등이 중심이 되어 많은 후진들을 양성하였다. 특히 '남도창'이라는 독특한 창법을 개발, 주화종 등과 함께 장흥을 소리와 가락의 고을로 만드는데 주역이 되었던 신흥재는 전국명창대회 판소리 가야금 대회에서 특상을 받았을 만큼 중앙무대에서도 인정을 받았던 대가였다.

이처럼 판소리를 비롯 가야금, 춤, 국악, 양금 등 국악 전 부문에서 교육하는 신청이 있음으로 장흥지역에서는 많은 국악의 명인들이 배출되었다. 이처럼, 장흥군은 한국 국악의 거대한 뿌리의 하나인 서편제를 잉태하고 발전시켜왔을 뿐만 아니라 여타 전통국악의 발전에도 크게 기여해 왔던 소리와 가락의 본고장이었던 것이다. 우리의 잘못은 이때의 신청을 복원하지 못한 것이고, 1990년대 명창 유영애가 장흥에 거주하며 개인 국악원을 개소하고 있었을 때 하다못해 군립국악원이라도 만들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잘못이었다.
이제 그나마 장흥의 남도국악과 서편제 본고향의 이미지로서 역할을 해오던 가무악제전도 없어진다면, 장흥과 서편제의 고리, 장흥의 가락과 국악은 완전히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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