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의 일이다. 안면이 없던 시절 그가 후배인 나에게 전화를 한통 해 왔다. 지방 가는 길에 평택에 들렸는데 술이나 한잔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곧장 평택역으로 나갔다. 시 쓰는 동업자 사이에 종종 있는 일이었기에 가까운 호프집에 들어가 서로의 근황을 물었다. 그날 그는 거품이 찬 맥주에 뜨거운 물을 부어 천천히 마셨다. 그 뒤 우리는 꾸준히 안부를 묻고 만나왔다.

사람의 인연이란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것이어서 횟수는 몇 번 안 되지만 그와는 늘 자주 만나왔다는 느낌이다.

후배인 나를 동생같이 여긴 탓인지 매번 염려 섞인 안부를 전해왔다. 그와의 인연은 주막에서 주막으로 이어지며 그의 학교가 있는 충무로나 인사동, 멀리는 수원까지 영토를 확장해 왔다. 고맙다는 말밖에는 할 말이 없다. 그리 크지 않은 키의 그는 언제나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다녔다.

그런데 요즘 들어 그의 가방에서 놀랄 만한 물건들이 나왔다.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문청 시절에 읽었을 법한 세계의 고전 문학들로 가방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그의 최근 작업을 본 짐작으로는 ‘시란 무엇인가’하는 고민이 깊어질수록 악랄하게 고전을 들여다보며 약간의 위안과 자기 실존에 대한 확인을 해온 것이리라.

그럴 즈음 이번 시집을 내면서 시집 해설을 내게 부탁한 것이 퍽이나 의외였고 뭔가 착각이 있었으리라 생각하면서도 시인이 쓰는 산문 형식으로 써달라는 그의 요구를 차마 뿌리치지 못한 것은 주막에서 맺어온 그 혼돈의 심교(心交) 때문이다. 그가 위대한 시인이 되어서 시가 텍스트로서 읽힐 때 시집 해설은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 터인데 시집 해설자가 오히려 방해가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면 미안하기도 하다.

그의 시집은 다양한 형식적 특성은 물론 내용적으로도 불우한 가족사부터 내면의 갈등 그리고 정치 문제까지 실로 광범위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러고도 무언가 다 말하지 못해 서운하다는 뉘앙스를 풍긴다. 그의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물들 혹은 음악이나 작품들에 대한 인유나 인용도 그런 느낌에 한 몫하고 있다.

첫 페이지를 넘기며 만난 것은 브레히트와 유사한 시적 발상이었다.
“이 바보 같은 사회에서/서정시는 무슨 소용이 있는가?”(‘여자 투우사’) 라는 일갈은 “나의 시에 운율을 맞춘다면 그것은 내게 거의 오만처럼 생각된다”는 브레히트의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의 절규와 상통한다.

브레히트의 시가 분명한 계급적 관계를 통하여 서정시의 의미를 묻고 있다면 전기철의 서정시에 대한 사유는 보다 복잡한 국면을 함유하고 있다.

전기철의 서정시에 대한 비토는 자본주의의 모순을 포함한 인간의 이기적인 삶에서 비롯된 자연의 대재앙 그리고 누이로 상징되는 척박한 노동의 현장까지 우리 시대의 일그러진 자화상에 바탕을 두고 있다. “허공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내일은 없는 거야”(‘여자 투우사’) 라는 일종의 선언적 문장은 이 시집 전체를 관류하는 메시지의 주요한 삐대를 이루고 있다.

“나의 시 한복판에 박히는” “투우사의 칼”은 어쩌면 전기철이 생각하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상징적인 답을 담고 있을 지도 모른다. 칼을 맞지 않은 시란 그렇고 그런 서정시일 뿐이라는 그의 인식은 자신의 시를 내용이나 형식에 있어서 극단의 지점으로 몰아가는 주요한 계기로 작용한다.

그의 시 근저에 놓인 상처는 불우한 가족사에 기초한다. 그것은 더러는 사실적으로 더러는 상징적으로 그려진다. 배추를 팔지 못해 돌아오지 못하는 어머니(‘한여름 밤의 꿈’), 전쟁이 끝나도 돌아오지 못하는 아버지(‘발해의 말 장수’), 창문이 없는 영혼(‘풀 하우스’)으로 술집을 전전하는 나(‘키치’), 사랑하는 연인을 잃고 나서 미국 재즈 가수 빌리 홀리데이의<불행해서 기뻐요>를 불러대는 형(‘불행해서 기뻐요’), 불행한 과거를 들쑤시고 살아가는 누이(‘부러진 봄’) 등 시집 전편에 내재한 불우한 가족사는 전기철이 그려내는 서사의 주요 의미망을 형성한다.

이 가운데 특히 누이의 이야기는 시급 노동자로, 이혼하고 두 아이를 혼자 키우며 살아가는 간병인으로 그려지며 불우한 가족사의 정점을 보여준다. 여성상의 상징이 어머니가 아니라 누이로 나타나고 있지만 궁극적으로 누이는 어머니와 동일한 존재이기도 하다. 누이의 몰락은 이미 어머니의 몰락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

따라서 누이의 모성성은 회복이 불가능할 정도로 파괴되어 있으며 시적 화자와 누이 그리고 어머니로 이어지는 육친의 관계성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기도 하다. 전기철의 시가 다른 시인들의 시와 다르게 누이가 등장하면서도 메마르게 느껴지는 이유의 일단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회복할 수 없는 육친의 관계는 트라우마로 각인되어 있다.

아버지는 위험한 야당 정치인이나 따라다니느라/집에는 코빼기도 내밀지 않았고/어머니는 미장원에 가서 처녀 적/미모에 대한 거짓말을 늘어놓느라/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았다.//총각을 떼기는 정말 힘들었다.//친구들은 내 총각을 떼어주려고/은회색 밤으로 끌고 다녔지만/나는 고자 콤플렉스에 시달렸다.//‘펜트하우스’를 보며 자위를 하고/타나토스와 에로스 사이에서 방황하며/잠을 설치기 일쑤였는데/자다가도 가위에 눌려 일어나보면/내 그림자가 자위를 하고 있었다.//그런 날 아침은 딴 세상이었다. -‘풀하우스’ 부분

고자 콤플렉스란 성인 입사 양식의 하나로 자신이 고자일지도 모른다는 공포에 기인한다.
섹스라는 행위는 성인과 아이를 가르는 육체적 경험이지만 실제로는 정신적 기원에 더 큰 무게를 둘 수 있다. 섹스를 할 수 없다는 콤플렉스는 비정상적인 가족 관계에서 오는 상처의 하나로 진단할 수 있다. 섹스는 분명히 심리적인 기제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다.

전기철의 시에 내재한 이 상처의 흔적은 지상에서의 현실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동일한 시간과 공간을 살아가지만 자신을 “먼 왕조의 위장 간첩” 혹은 “위장 전입자(굿모닝 충무로)로 규정한다는 점에서 그가 지닌 불행은 현재 진행형이다.

나는 먼 왕조의 위장 간첩/내 안에 역사가 넘쳐/질질 끌고 다니는 기억들 때문에/두 귀는 서로 다른 소리를 듣고/머릿속에서는 풀이 자란다. (중략)

부비트랩이 널려 있는 세상에서/불행은 전염되고/예언자의 모순된 말을 알아들을 수 없으니/나는 다시 먼 왕조로 돌아가야 하는가 -굿모닝 충무로’ 부분

상처의 기원이 불행한 가족사든 혹은 세계 인식의 한 방법이든 간에 고자 콤플렉스는 여전히 그를 괴롭힌다. 세계와의 섹스가 불가능한 상태를 그는 부비트랩, 불행, 알아들을 수 없음으로 표현한다.

먼 왕조의 위장간첩이라는 말은 돌이켜 보면 이 시대와 불화한다는 의미이며 그가 다시 먼 왕조로 돌아간다는 것은 심리적 퇴행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 홍사용이 시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눈물의 왕이로소이다”라고 외쳤던 심리적 상태가 전기철의 시 곳곳에 보이는 것은 심리적 발달 과정에서 위험이나 갈등을 겪을 때 그동안의 발달의 일부를 상실하고 마음의 상태가 과거로 후퇴하는 심리적 방어기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숨겨진 자아의 또 다른 모습이 전기철의 시에서는 왕인 것이다.

이오네스코의 희곡 ‘왕은 죽어가다’에서 촉발한 왕의 이미지는 그의 시 전반에 자기 동일성을 띠며 나타나고 있다. “여동생이 이혼하고 어머니의 집으로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한 말이 떠오르자 폐허에 묻힌 왕의 고독이 밀려온다” 그리고 “이오네스코의 ‘왕은 죽어가다’를 몇 줄 읽다가 던져버렸다. 나는 이미 죽은 왕이니까”, “나는 달나라의 왕!” 이라는 구절은 전기철에게는 현실계에서 패배한 자아의 형상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생각은 죄가 되는 시대/나는 어둠과 말다툼을 한다.//약속이 많은 밤/사형 집행당한 영혼들이/병에 걸린 허수아비처럼 중얼거릴 때/나는 은밀한 슬픔을 안고 있다가/폐위된 왕인 양//비밀을 털리고 만다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 부분

희곡 대사에서 방백 혹은 독백 같기도 한 위 시는 설화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강물과 공기까지도 부자들에게 팔린 도시(‘외눈박이 거인의 나라’)에 살아가는 고통을 그리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폐위된 왕처럼 이 시대로부터 멀려나는 시적 화자 자신의 얼굴을 스스로 지켜보는 것은 병적이라는 인상을 준다. “내 머리는 불행의 창고”라는 절규는 이 시대와 화해할 수 없는 한 예술가의 초상을 제시해 주고 있다. 전기철의 시에 나타난 세계와의 부조화는 유토피아 혹은 일상이나 자연으로 회귀하고 싶은 욕망의 좌절에서 비롯된 것이다.<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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