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 4.11 제19대 총선에 출마한 한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선거사무장이란 직책을 갖고 참여한 이력이 있다.

내가 이 방면에 출중한 재주가 있어서라기 보다는 아마 과거 면장 벼슬의 공직경력을 크게 사서 누구보다도 지역정서에 밝을 것으로 내다보고 나를 선택했을 것이고 백수인 나로서는 약간의 호기심이 발동했고 또 후보와 가까운 관계라서 거절치 못하고 망설이다 권유에 긍정의사를 표시한 것뿐이다.

그렇게 출발한 당시만 해도 참신성과 중앙에서 닦은 화려한 경력을 발판으로 가장 품격있는 적임자라고 자타가 공인하는 후보를 등에 업고 믿음과 희망을 갖고 신명나게 뛰었다.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속칭 자원봉사란 명함으로 협조하는 선거운동원들을 비롯하여 사회 지도층 인사들까지 모두가 이번 후보 중 “K씨가 제일 나아” 라고 고개를 끄덕일 정도였다. 후보 역시 섬김과 비움의 정치를 하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그러나 막상 1차 중앙당의 공천심사 위원회 심사결과 3개 지역에서 나온 여섯 후보 중 1개 지역 후보 2명에게만 복수 공천하고 우리후보는 탈락하는(컷오프) 어이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말았다. 낙천의 중대 사유인 즉 당에 대한 기여도에서 상대후보에 뒤떨어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기여도란 게 중앙당에 내민 봉투의 높낮이에 따라 이미 불거진 특정후보의 정체성과 도덕성 등 흠집 따윈 덮어두고 공천 순위가 뒤바뀐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확인된 바 없는 낭설에 불과하겠지만, 어떻든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 할 수 없는 아리송한 이야기로 들렸다. 과거에는 비례대표 자리를 공공연히 돈으로 산다는 소문이 나돌았었는데 그렇다면 이번 공심위의 공천이 제2의 비례대표제와 다를 게 뭐 있겠는가 말이다.

이제 우리후보의 차선책은 당에서 백의종군하던지, 아니면 탈당하여 무소속 선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서 고민 끝에 탈당계를 내고 전격 무소속 출마선언 기자회견을 하게 된다. 그런 발표 이후 며칠 못 가서 돌연 후보께서 참모들을 집합시킨 자리에서 승산이 없는 전쟁에 무익하게 뛰어들 수 없다며 충격적인 후보사퇴의사를 밝히고는 언론에 성명서를 발표함으로써 중도하차의 불명예를 안게 된 것이다.

하여 들뜬 잔치 끝의 적막감이랄까 혹은 허탈을 선거캠프에 남겨놓고 후보는 그렇게 쓸쓸히 상경하였다. 무소속 완주의 철석같은 약속이 허무하게 무너지자 선거캠프의 한 여성 자원 봉사자는 울먹이며 자리에서 떠날 줄을 몰랐다.

또 다른 자원봉사자들의 가슴의 상처를 치유하기까지는 상당기간이 걸릴 것이라고들 말한다. 다행이랄까 호보께선 선거비용 1억원을 지역인재육성 장학금으로 쾌척함으로써 정치운명의 한가닥 여운을 남기며 떠나는 뒷모습에서 타후보들의 귀감이 되었다.

그만한 결단도 하기 어렵다며 뜻있는 인사들을 마치 큰 재목이 몸에 붙은 콩알만한 혹 하나를 떼내지 못하고 (약세후보와의 단일화 협상결렬) 결국 땔감으로 팔려가는 슬픈 사연에 애석함을 노정하기도 했다.

한편 지역 분위기는 이번까지 세 차례나 똑같은 전과를 걸어온 후보에게 내 처음부터 그럴 줄 알았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있으며 또 철새는 날아가고 텃새들만이 노는 판이 되었다는 등 비아냥거림도 있어 그것들을 감수해야만 하는 지역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입장도 난감했다.

말이 나왔으니 망정이지 선거 시기만 되면 우리들 입에 자주 오르내리는 “철새 정치인” 얘기가 흥미롭다. 자기의 이익을 노려 여태껏 몸담고 있던 정당을 쉽게 바꾸는 정치인이나 선거 때면 뜬금없이 나타나 명함을 건네며 애걸복걸 출사표를 던졌다가 여의치 않으면 중도에 그만두고 한동안 소식도 없이 절치부심 또 다음기회만을 엿보는 정치인을 보고, 목숨을 걸고 긴 여행길에 오르는 철새에 비유한다는 것은 동물의 삶에 대한 모독이라고 했다는 어느 동물학자의 말에 공감이 가기도 한다.

자료에 의하면 한국에는 260여종의 철새가 방문한다는 것, 여기에 110여종의 텃새를 포함하여 총 370여종의 새가 있다고 한다.

그런데 철새는 혼자 먹이를 챙기겠다고 무리에서 절대 이탈하는 경우가 없다고 한다. 기력이 쇠하거나 다쳐서 낙오할 때는 동료가 남아서 기다려준다는 놀라운 얘기도 있다. 시베리아에서 날아와 우리나라 갯벌에서 체력을 보강한 후 한 번도 쉬지 않고 오스트레일리아까지 날아가는 특정 철새에 대해선 놀라움과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일부 비도덕적인 정치인에 비한다면 오히려 배려와 책임면에 있어 철새에게서 배워야 할 교훈이 많다고 본다.

이렇듯 우리에게 보편적 정서에서 철새는 계절의 순환을 알리면서 자연의 넉넉한 운행을 시사하는 날 짐승이었다. 또 순리라는 인생론적 감회를 안겨주는 어김없는 전령(傳令)이었다. 매임없는 자유의 이미지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날개였다.

가장 아름다운 우리말의 하나가 정치적 비행과 연루됨으로써 오염되고 훼손되었음을 개탄하지 않을 수 없다. 철새 정치인은 애초부터 잘못된 짝짓기요 잘못된 명명이었다. 문제는 철새의 깃이 아니라 몸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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