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출신의 항일독립운동가로 몇 분이 있다. 그 중 덕암(德菴) 위석규(魏錫奎) 옹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다. 항일운동으로 한창 나이인 30세에 별세했기 때문이다.
위옹의 출신지는 관산읍 당동(堂洞). 조선조 말엽인 1883년(고종 20)에 태어났다. 자는 여장(汝章)이고, 호는 덕암(德菴). 증조부는 위도방(魏道昉)이고, 조부는 위영집(魏榮集)이다. 아버지는 위윤조(魏胤祚)이며 4남 2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족형(族兄) 위봉식(魏棒植)과 명강(明岡) 백봉흠(白奉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905년(광무 9) 일본의 강압에 의해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최익현(崔益鉉)의 의병 모집 격문을 보고 의병으로 나섰으나, 이후 면암이 체포되고 의병이 해산되면서 ‘대한독립 투쟁’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귀향했다.

그러나 이듬 해인 1906년(광무 10), 일본의 침탈에 항쟁하기 위해 독립투쟁이 가능했던 중국으로 떠나 만주, 러시아 등지에서 박태문(朴泰文), 강명운(姜明運), 국사성(鞠思成) 등과 함께 항일운동을 펼쳤다.

그러나, 안타깝게 망국의 한을 가슴에 묻은 채, 1913년 4월 27일 러시아 니콜라스에서 항일운동의 여파로 병을 얻어 한창나이인 향년 3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위 옹의 묘는 니콜라스 한인공동묘지에 안장되었으나 시신을 찾을 길이 없어 고향에서 유품으로 대신 장사를 지냈다. 현재 관산읍 천관산 도립공원입구에 위 옹의 의열비가 세워져 있다.

덕암 위석규 옹의 의열비 앞에서, 지난 3월1일 독립지사 덕암선생 추모회(회장 전길태) 주최로 독립운동의 의미를 되새기고 덕암선생의 항일독립 정신을 기리는 ‘제 93주년 3.1절 기념 및 독립지사 덕암 위석규선생 순국 100주년 추모제’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덕암선생의 후손(孫 위황량) 등과 전 남도대학 박평준학장을 비롯, 위두환 장흥위씨도문회장, 장흥향교 문상배 전교, 장흥유도회 변종주 회장 등 다수의 유림인과 관내 기관단체장, 지역민 등 1백5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행사는 추모회 위철양 총무의 사회로, 기념사(이명흠 군수), 3.1절 기념문 낭독(황월련 군의회의장), 덕암 선생의 약력소개, 추모사(전길태 추모회회장), 제례, 헌화, 만세삼창 등의 순으로 진행하여 3.1절의 숭고한 정신과 덕암 선생의 항일독립정신을 기렸다.
이날 추모 제례는 초헌관 김문호관산읍장, 아헌관 김희웅 장흥문화원장, 종헌관 임하민 관산읍번영회장이 맡아 제례를 봉행했다.

이명흠 군수는 “덕암 선생은 의향 장흥군의 충의(忠義)를 실천한 위인이었으며, 특히 망국의 한을 안고, 항일독립에 투신하여 대한인으로서 기개를 떨친 숭고한 인물이었다”면서 “선생의 그 충의, 애국정신이 오래도록 장흥인들의 가슴에 새겨지면서 지역발전과 지역민화합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확신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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