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글을 올리며, 제 어머님 상례에 問喪오신 고운님들 또 시간상 問喪은 못오시고 편부해주신 모든 분들께도 머리 숙여 감사드립니다.

감사의 뜻을 장흥신문 지난호(제562호)에 광고로 게재해 올렸습니다만, 그 전에 일일이 전화 못 드리는 점에 대해서 양해를 구하고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고 조순남(曺順男)어머님께서는 지난 11월 31일 아침에 위독하시다는 소식이 광주 효정병원에서 연락이 왔고, 심장의 상태가 좋지않아, 동생들에게 연락을 취해 임종 전 모든 자식들을 마지막으로 만나뵐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 12월 1일 오전 11시 30분 영면에 드셨습니다.
향년 88세. 힘들지만 곱게 사시다가 고운 자태로 큰 고통없이 숨을 거둔 것입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위안부를 피하려고 15세라는 어린나이로 백씨 가문으로 시집오셨고, 해방을 맞아 일본에서 귀국하여 사경을 헤매이기도 하시었고, 6.25때는 우리 3남매를 데리고 모진 피난생활을 영위하기도 하시었던, 그리고 8남1녀를 낳아 3형제를 먼저 저 세상으로 보내며 그 한을 가슴에 묻은 채 5남 1녀를 훌륭히 키우셨던, 한결같이 아름다운 희생과 완벽한 헌신으로 평생을 불사르셨다가 그 인생의 마지막을 그 가치만큼 아름답고 숭고한 자연사로 당신의 삶을 종결지은 것입니다.

부모와 자식은 천리(天理)로 맺어진 인연이기에 더 말할나위없이 귀하고 소중하지만, 저희자식들의 경우, 어머님의 삶 자체가 너무나 훌륭한 교훈이었고 삶의 가치에 대한 절절하고 귀한 자양분이었으며, 그 종생(終生)의 자태마저 훌륭한 가르침을 주시고 몸을 거두었습니다.
입관식 때 그 90여년 세월, 70여 년의 시집살이가 곡진하게 배어있을, 영혼이 떠나간 그 초라한 몸뚱이를 보며, 그 몸 위에서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당신의 삶을 기억하며 하염없이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장례 때 많은 친인척이며 친구 선후배 등 조문객이 다녀갔지만, 그분들 중 어머님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기도 하고 정을 나누기도 했던 친구들이며 친인들이 슬픔의 눈물을 흘려, 그들의 눈물과 함께 저 역시 눈물을 함께 쏱기도 했습니다.

돌이켜보면, 당신의 삶은, 우리 형제 자매들에게 뿐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배품과 나눔의 삶을 소리 없이 실천해 온 삶이었습니다. 그 추운겨울에 장에 가기 위해 새벽에 집 앞에 모여든 트럭 손님 3,40인들에게 쌀죽을 쑤어 제공하기도 했고, 어려운 이웃과 친인척들에게 용돈이라며 제법 두툼한 봉투를 건네 주기도 했던 모습이 생생합니다.

운명하시기 20여일 전 어느 날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승정아, 사람은 후덕해야 한다, 그리고 항상 나들이 때 정장을 하고, 와이셔츠는 세탁소에 맡겨 항상 깨끗이 단정하게 구두도 반질반질 닦고 다녀라.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당당해야하는 법이다”라고 유언 같은 말을 남기셨습니다.

후덕(厚德)하고 당당하라, 이 말은 평소에도 가끔씩 충고하듯 하는 말이었습니다만, 이날 만큼은 가슴깊이 새겨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어머님 당신의 삶이 그렇게 살아오셨던 것으로 이 자식은 감히 증언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 말을 모든 형제들에게도 전해주었으며, 그 후로 과연 나는 그렇게 살아왔는가, 남들에게 덕을 베풀고 정정당당하게 내 인생을 살아왔는가 하고 깊이 자성하고 있습니다.
당신은 가셨지만, 저희 남겨진 자식들에게 많은 삶의 교훈을 남기셨습니다.
지금도 당신을 생각하면, 절로 눈물이 앞을 가리고, 당신이 소원하셨을 아름다운 삶을 살아오지 못한 자신을 반성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은 저에게, 모든 형제들에게, 모든 손녀들에게, 삶의 아름다운 종결판을 보여주시었고, 삶의 모든 귀감을 남기셨으며, 그러한 당신의 삶을 성경처럼, 불경처럼 우리 곁에 남기셨으며, 남겨진 자녀, 손녀, 증손녀들의 인생의 등대가 되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어머님을 회억하는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부디 영면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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